그들만의 서툰 방식으로.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용입니다.
그는 극 중 배경인 영도가 우연찮게 그림자 '영'(影)에 섬 '도'(島)라는 말을 했다. 바쁜 주중 사이 영화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주말을 기다리던 나는 멀리 떨어진 도시의 독립극장을 찾았다. 감독과의 대화가 잡혀있던 그 날은 어쩌면 운명처럼 그랬다. 내가 궁금해하던 모든 것들을 대신해주는 멋진 관객들 덕에 이 좋은 시간이 차차 마무리되어가는데, 말미에 등장한 질문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거, 이 영화가 노동자들의 죽음을 종용하는 것 아닙니까.’
일제히 관객들은 뒤돌아보고 나 역시 한숨을 푹 쉬었다. 저런 생각이 나올 수도 있구나.
다큐멘터리가 가지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 현실감을 잊을 정도로. 다른 영화들과 달리 다소 부족한 느낌의 촬영이 주는 것이 한몫한다. 그러나 그 서툰 영상은 미묘하게,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 이건 조선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동지, 투쟁, 쟁취.
7-80년대에나 사용했을 법한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공격적인 것에서 특히 심하다. 실제로 그때 사용했던 단어들이 조금도 변치 않고 사용되고 있으니 ‘노동운동’이 주는 느낌 역시 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진해운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다. 노동조합이 가지는 단순한 목표는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는 것. 어째서 처음부터 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는 기업이 갖고 있는 것이니 논외로 두어야겠다.
쥐가 잔뜩 똥을 싸 놓은 도시락과 700명 정도를 한 번에 수용하는 열악한 생활관, 없는 화장실 때문에 건조 중인 배 하단에 용변을 보는 일들. 비가 오는 날, 미끄러져 떨어진 사람을 내려다보고 무심히 하는 말. “어이구, 또 하나 깨졌네.”
처참한 일상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 채 일을 계속한다며 웃는다. 위험한 일들에 대한 거부권과 깨끗한 화장실을 갖게 된 것이 알고 보면 노조에 있던 몇 명의 자살로 얻은 것이라고. 우린 몇 명의 제물을 더 바쳐야 하냐는 물음을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해요. 할 게 그것밖에 없거든.”
이런 종류의 파워게임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최근 나온 드라마 <송곳>이 더 적나라한 표현을 해줬다. 협의가 끝날 때까지 매일 밤 고기를 구워 먹을 수도 있는 사측과, 당장 내일의 쌀을 어디서 구해올까 고민을 해야 하는 노조원들. 그 장기전에서 떠오르는 유혹은 모든 기업이 이상하리만치 똑 닮았다.
지금이라도 관두고 돌아오면 반이라도 줄게.
노조는 어째서 구닥다리 방식을 고수하는가.
꼬리표처럼 따르던 물음은 해소되지 않았다. 세상에 부당함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가진 폐쇄성이 어쩜 이렇게도 강한지, 졸라 맨 빨간 머리띠에 군가처럼 제작된 웅웅 거리는 노래들은 따라 부를 수도 없도록. 스스로가 말하는 단결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가 갇혀버린 느낌이다. 배움이 부족하고 거친 일들을 하는 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최선이 그것뿐이란 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기에. 결국 이미지를 바꾸지 못하면 승산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감독에게 쏟아진 질문은 다양했다.
왜 악을 더 선명한 악으로 그리지 않았는가. 포스터와 카피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째서 제목을 저렇게 지었나. 인터뷰이의 기억들이 어긋난 부분은 왜인가. 모든 질문의 답도 예상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남자가 던진 마지막 질문을 빼고. 어수선함이 일고 신경전이 생겨 결국 앞자리의 여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우리도 저들과 단결하여 규합하여야 돼요.’
맞는 이야기가 주는 거부감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런 분쟁이 눈 앞에 일어나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고,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문제를 던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요.’하고.
과연 당신은 어떤가.
나는 감히, 다음 차례는 당신일 수도 있다고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