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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Nov 17. 2016

아무도 평하지 않을 세계

영화 <스플릿>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투를 주제로 만든 <타짜> 이후로 도박은 영화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고 있다. 정우성 주연의 <신의 한 수>역시 바둑을 매개로 하여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기본 스토리를 갖고 있다.(후반부엔 영화 장르가 완전히 바뀌는 느낌이 들지만.)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 흔해진 도박의 종류가 되었다. 축구나 농구의 승부조작은 뉴스에서 한 번쯤 들어봤어도, 꽤 생소한 소재. <스플릿>은 볼링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정말 뻔하다.


나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스토리는 뻔하다. 한 때 국가대표였던 철종(유지태 분)이 사고로 다리를 다친 뒤, 희진(이정현 분)과 함께 도박 볼링을 하고 다닌다. 한 경기에서 백사장(권해효 분)을 만나 패하고, 빚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 두꺼비(정성화 분)에게 진 빚은 희진의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볼링장. 그 볼링장을 담보로 잡혀 판돈이 큰 도박 볼링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철종과 희진. 어느 날 철종은 동네 볼링장에서 특이한 자세로 볼링을 치는 영훈(이다윗 분)을 발견하게 된다. 영훈은 정신지체아였고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도박 볼링에 끌어들인다. 후에 벌어진 큰 판에 백사장의 선수가 되어 나름대로 반전을 거듭하며 승리를 거머쥐고 두꺼비까지 이기고 나서야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 말미에는 뻔하게도 영훈이 국가대표가 되는 것.


치사하다.


비열한 영화라고 느꼈다. 뻔한 것이야 요즘 대중 영화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더욱 슬프게 했다. 좀 웃을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면 그뿐인데. 혹, 나 같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지는 않을까. 관객은 두 번 크게 웃었다. 영훈이 철종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며 지저분하면 안 된다고 바닥을 박박 닦는 장면의 이름을 철종이 불렀을 때 소리를 지르며 경기를 일으키는 장면. 나는 그 웃음들이 섬뜩했다.



정신지체장애인에게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뒤따랐을지 심히 우려되는 그 장면들을 웃어넘길 수 있는 건, 주인공 철종 역시 사고로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지체를 이해할 수 없는 일반인의 마인드로 영훈에게 접근하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영훈의 장애를 웃음거리로 넣기 위해 만든 설정이 그랬다면 더 심각하다.


영화 <말아톤>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말아톤은 악역이 있었고, 보호자가 있었다. 극 중의 초원이가 하는 난해한 행동과 다소 직설적인 말투가 정겨운 것은, 그것이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코치에게 따박따박하는 말과 행동에 코치가 꼼짝 못 하였던 것도, 초원이의 엄마가 대신 분노하는 것에 관객이 눈물을 흘렸던 것도.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훈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방조는 더욱 비교되는 것이다.




친절하지 않다.


그런 영훈에게 초점을 맞추니 영화는 내내 불편하다. 밀키스와 불량식품으로 영훈을 꼬시기엔 성공했지만, 짜장면에 꼭 오이를 넣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영훈의 당당함이 감독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난 믿는다. 영훈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영훈 앞으로 남긴 식당을 차지하기 위해 영훈을 장애인 센터에 가뒀고, 장애인 센터에서는 철종과 희진이 가져온 돈을 받고 바로 영훈을 내보낸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당연한 일이니까.


중간에 돈을 달라는 말에 철렁한 철종과 희진은 조심스레 액수를 물어보는데 영훈은 고작 차비 만 칠천 원가량을 말한다. 이내 안심하는 표정이 서글프다. 점점 친해지며 정을 쌓는 스토리야 뻔하지만, 돈에 민감해지는 걸 보면 역시나 남은 남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연기.


이정현을 말하려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전작에서 이미 돈에 치밀해져 봤기 때문에 겹쳐 보일 수도 있겠지만, 비슷한 역할을 맡음으로써 스크린 데뷔 후 이 역할 하나는 확실하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정성화도 악역으로의 변신이 놀라웠다. <부산행>의 김의성 씨에게 배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깐죽거리며 비열한 역할을 걸쭉한 농도로 해냈다.


아무렇지 않게 나쁜 일들이 벌어지는 영화가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되려 그런 감정이 든 것은 장애인에 대한 폭력과 언행이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데도 터부시 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만일, 감독이 관객의 이런 불편함까지 노린 것이라면 박수를 쳐야 할 것이다.

영화 말미에 박수를 쳤던 내 뒤의 아주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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