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쉐이크의 기억

역시 남자라면 핑크지.

by 박하


게임 캐릭터의 닉네임을 정하는 일이란 내게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꿀 수 없으니까.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주는 금기의 무게에 나는 고작 닉네임 하나에 몇 시간씩 고민한다. 자주 쓰던 닉네임은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것이어서,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짜내야 했던 것도 같다. 사람들이 쓰지 않는 것이 없을까. 그러면서 나에게 특별한 것. 뭐 그런 닉네임이야 그렇다치고. 캐릭터를 만들고 들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핑크색 아이템들로 캐릭터를 도배하는 일이었다. 왜 뭐 어때서. 난 동성애를 존중한다, 비록 난 아니어도.


그리고 늘상 '넷카마'라는 명칭이 따라 붙곤 했다. 오해한 건 자기들인데. 게임을 도와주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핑크색' 그 하나만 보고 초보인 나를 여성유저라 단단히 착각하고 만다. 남자라는 걸 알았으면 도와주지 않았을거란 식으로. 나에게 속았다는 말과 함께. '넷카마'는 온라인 상에서 성별을 속여 활동하는 유저들을 일컫는 단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포기하지 않고 게임 서버의 레어 아이템까지 핑크색으로 맞추고 나서야, 그냥 단순히 핑크색을 좋아하는 이상한 녀석이라고 적당히 알려지게 되었다. '남자라면 당연히 핑크지!' 그런 말을 지껄이고 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곤란해지지 않기 위하여. 왜 여성의 것 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들에 대하여 난 용감해져야하는가.



상트페테부르크, 러시아.(2017)



딸기 쉐이크


탄산을 먹지 못하는 나의 동네는 후진 시골구석이어서 읍내까지 나가면 맛없는 롯데리아밖에 없다. 적자투성이라는 불평만 많은 사장은 왜 멍청하게 롯데리아 같은 걸 골랐을까. 그래도 그 때 당시, 맥도날드나 kfc에는 없는 '밀크 쉐이크'가 내겐 행운이었다. 다른 곳에선 햄버거를 먹으려면 추가금을 꼭 내고 양도 더 적은 오렌지 주스 따위를 골랐어야 하니까. 뭐 300원만 있으면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가끔 햄버거가 먹고 싶을 때 맛 없는 롯데리아에서 그나마 불평을 덜어줬던 것이 밀크 쉐이크였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가 어떤 맛으로 하시겠어요 하는 말에 초코, 바닐라, 딸기 중 꼭 딸기를 골랐다. 상큼해서 맛있으니까. 매번 딸기 쉐이크를 말하는 내 입모양이 이상한지 '딸기요?' 되물으며 갸우뚱하는 여자는 딸기를 고르는 덩치 큰 남자의 모습에 어떤 것이 문제였던 걸까. 그리고 그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지금은 알게 되었을까.



상트페테부르크, 러시아.(2017)



분홍 토 슈즈


기억 가장 안쪽 부근에는 발레를 배운 기억이 있다. 글을 배우기도 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나는 또박또박, 명조체도 고딕체도 아닌 어설픈 폰트로 이름 세 글자를 적은 토 슈즈를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진입 장벽이 높은 고급 무용으로 생각되는 발레를, 어떻게 스무 해 남짓 전. 한국 일산 부근에 살던 고작 유치원 다닐 무렵의 남자애에게 시킬 생각을 했는지. 엄마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나에게 핑크색 토 슈즈를 건넨걸까. 90년대의 중반에는 어떤 발레영화가 유행을 탔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일단 그 실크같이 보드라운 촉감의 신발을 나는 나만한 가방에 매달고 다녔다. 뭐 그 이후는 뻔하게도 예상한 바와 같았다. 핑크색이 여자의 색이라고 놀림을 시작한 건 뱃살이 볼록 나온 같은 반의 남자애에게서였다. 남자 무용수는 아주 귀하다는 학원 선생님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아이가 그리 쉽게 발레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핑크색이 여자의 색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이어서 엄마에게 난 까만 토 슈즈를 구해달라는 말을 했었다. 어린 발톱이 들려 피가 나도 꽤 좋아했던 나의 그 운동은 고작 그 뚱뚱했던 녀석의 말로 인해 달라졌다. 같은 유치원의 한 여자아이와 함께 발레학원에 가는 것까지 신경써야 했고, 발레가 무엇인지도 잘 알려지지 않던 시대에 '여자의 색'밖에 팔지 않던 토 슈즈를 가방 깊숙이 숨겨야 했다.


뭐, 가지 않는 척 노력했던 발레에 대한 기억은 그 쯤에서 끊겼다. 사실 기억은 난다. 그 짓궃은 뚱보 녀석은 내가 싫었는지 혹은 자신이 남성답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나의 토 슈즈를 꺼내 놀렸고 나는 매직을 꺼내다 토슈즈를 까맣게 칠하고서 혼났던 기억. 그런 핑크의 쌉싸름한 기억.


블라디보스톡, 러시아.(2016)

케이크 가게의 남자.


얼마 전에 고독한 미식가를 보며 주인공의 행동에 감동했다. 먹는 것도 물론 맛있게 먹어 탄성을 자아내지만, 케이크 가게를 혼자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음미하는 모습이란. 마치 여자의 영역에 홀로 뛰어 든 돈키호테 같은 모습이랄까.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나 역시 해 보았기에 그 기분을 십분이해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디저트를 판다고 했다. 전단지가 휘황찬란한 것을 둘째치고, 이름도 생소한 파르페 라던가. 에끌레어 라던가. 귀티나는 이름에 걸맞는 맛을 그 가게에서 만들 수 있는지 아닌지도 사실 잘 모르지만. 그런 것들을 판다고 했다. 그것도 무한 리필. 가격이 적은 편도 아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곳을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티라미수나, 크레이프 케잌 같은 것도 먹어보고 싶었고 고작 먹어 본 케이크라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파는 생크림 케이크 밖에 없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주인을 잘못 만나, 단 걸 먹지 않는 부모님의 단호한 결정으로 치즈케이크도 먹어보지 못했다니. 그렇게 난 단맛에 빠지고 싶은 유혹으로 결국 그 가게에 당당하게 걸어들어갔다.



여자화장실에 들어온 느낌.


굳이 표현하자면. 뭐 직원부터 손님까지 남자는 보이지 않았으니, 심지어 계단을 올라가는 2층의 가게라 길을 물으러 들어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이왕 이렇게 된거 맘껏 먹어보겠다고 혼자 당당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랬다. '혼자 왔나봐.'


그렇게 떠들어라, 이렇게 인류는 발전하는 거라고.
거창한 생각까지 하며 난 브라우니와 티라미수의 차이를 그 날 깨달았다.


얼마 전엔 디저트 카페에 갔다. 다행히도 여자와 함께였지만, 요즘 세상에 혼자 케이크를 맛보러 오는 남자가 많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공간이라고 선입견이 박힌 곳 문턱 앞까지 가는 것이 힘든 남자들에게 겁낼 필요가 없다는 걸, 뭐 애인과 함께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제 이것은 핑크를 사랑하는 남자들에 의하여 용감한 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함께 손톱 관리라도 받으러 가보는 건 어떨까.


분홍색 케이스를 씌운 휴대폰이 울리고 있으니 잠시 뒤에. 아, 그리고 난 정말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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