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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한얼 Haneol Park Apr 07. 2022

운명론

오늘의 생각 #24


인문학 강의를 듣다가

그리스 희곡 '오이디푸스'를 접하게 되었다.


욕망이나 능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찌 보면 운명론을 표현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운명론은 어쩌다 생겼고 이런 사상을 믿는 사람들은 왜 믿는 걸까? 고민해보게 되었다.

(인문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일지도...!)


나도 지난 글에서,

사실 우리들의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고 있어서

굳이 미래를 바꾸려고 애쓰기보단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난 그냥 받아들이고 싶은 거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지금 당장에는 불행으로 해석되거나 그렇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인정하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때

외부에서 쉴 새 없이 나를 쿡쿡 찌르는 귀찮은 자극들이

쌓이고 쌓여 과도한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냥 받아들이면, 인정하고 나면

초연해지기 마련이다. 당연한 것이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진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어쩌면 인간들이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불행들,

사소하든 크든 그 다양한 불행들을

'이건 내 운명이 아니야' 하며 거부하고 발버둥 칠 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온 몸이 잠식되어버리는 모래지옥처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세상일 내 힘으로 통제 수는 없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수용의 자세, 그런 넓은 마음가짐을 가지려 노력하다 발견한 것이 '운명론'이 아닐까?


내게 일어난 사건들을 그저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냐, 네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어!"

이건 어쩌면 과도한 긍정 수 있다.


인문학 서적 '피로사회'의 내용이 또 문득 떠오른다.

과도한 긍정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경증적 질병을 일으켰다고 한다.

피로해, 열심히 안 할래... 남에게 증명해야 하는 성과들이 아니라 내 욕망을 쫓을래... 이런 피로사회를 지향하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


조금 진부하지만, 어쩌면 운명이라 칭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거부하고, 대항하고, 되돌아가거나

혹은 뒤바꾸려고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싸움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할 필요도 없는, 의미 없는 투쟁을 왜 하는 걸까?

그냥 그런 것도 어딘가에는 존재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고,

내가 진정 싸우고 싶은 판에 찾아가면 될 것을.


운명론은 어쩌면 '수용'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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