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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한얼 Haneol Park Jul 05. 2022

완벽하지 않아서 기적을 만드는 우리

오늘의 생각 #34


나만의 연례행사가 있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을 정주행 하는 것!

올해는 7월이 되어서야 다시 보고 있다.

이번으로 벌써 3번째 정주행이니 이 정도면 연례행사로 쳐도 되지 않을까?

3년째 매년 생각 나는 작품이니 말이다.

어린 왕자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매번 감상이 달라지는 드라마다.


초록 지붕 집, 그린게이블

1화는 굉장히 암울하고 드라마틱하다.

나이가 들어 일손이 필요해진 커스버트 남매가 보육원에 있는 고아 출신 남자아이를 일꾼으로 데려오려 하는데,

중매자가 그들이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보육원에 잘못 전달하여 앤이 그들이 사는 그린게이블에 도착한다.

처음엔 여자아이는 필요 없다며 착오가 있었으니 보육원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커스버트 남매는 앤을 입양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 중에서 그 중매자가 워낙 덜렁대는 성격이라 이런 일이 자주 있다고 나오는데

참 묘한 일이다...

그 덜렁이의 실수 덕분에 고아였던 앤이 가족을 얻게 되고

늘 서로 말이 없고 감정표현하지 않던 무뚝뚝한 남매가 둘이서만 심심하게 살아오다

앤을 만남으로써 말년에 갑작스레 감동, 슬픔, 걱정, 환희로 가득 찬 풍요로운 삶을 찾게 되니 말이다.

마치 기적처럼!


실수는 때로 이렇게 새로운 것이 끼어들 수 있 빈틈을 만들어준다.

그 빈틈이 어쩌면... 작게는 한 사람을, 크게는 세상을 바꿀 기회를 들여보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효율성을 위해 체계적으로, 일관적으로 일이 쉽게 진행되길 원하며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본인이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그랬는지 색출하고, 이어서 책망을 한다.

그게 당장은 해결된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효과적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래서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될 거라고 착각하는 거다.

무책임하게도, 다 실수하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합리화해버릴 수 있는 거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없었던 적이 있었나?


사람은 단순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복잡해지고, 사건사고가 생기는 게 당연한 일이다.

'누구 탓'이라는 건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건 우리 모두의 영향이 이어지고 이어진 결과다.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왜 다들 분리해서 생각하는 거지?

누군가의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인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체계적, 일관적을 따지는 사람이

정작 전체적인 구조와 시스템, '우리'의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색출하고 책망하는 것으로 무책임하고 권위적이게 쉽게 쉽게 해결하려는 걸 보고 있자면...

그 모순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른다.


누군가를 탓하는 분위기에서는 암묵적으로 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니까.

내가 지목당하고 놀림당하는 건

초등학교에서나 일어날 법한 유치하고도 수치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런 스트레스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역량을 100퍼센트 펼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데도 괜히 나서지 않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바닷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리지 않거든요."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는 흔한 말처럼,

실수도 기회라는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문젯거리도, 누군가를 탓할 일도, 크게 연연할 일도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걸린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평생 볼 사람들도 평생  사건도 아닌데, 다들 너무 연연한다.

나도 그렇다.

너무 연연한다.


실수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까지 내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고 감사하게도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린 기적이다!




빨간 머리 앤을 3번째 정주행 하는 25살의 내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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