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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한얼 Haneol Park Nov 03. 2023

낙엽처럼 저물어가는 것들이 좋아

오늘의 생각 #62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 현상이 벌어질 때까지 나무에게는 수많은 일이 일어난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푸르게 자랐다가 주황색으로 익었다가 한 순간에 톡 하고 떨어진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빠르게 바뀌고 있지만, 자연과 우리의 삶은 늘 본질적으로 닮은 점들이 있다.


'변화'가 계속되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결과나 현상은 여러 사건들이 쌓이고 쌓이다 한 순간에 벌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성공이나 실패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다. 모든 게 수많은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집 앞에 피어있는 낙엽을 보다가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낙엽처럼 저물어가는 것들이 좋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되니까.

노을이나 황혼도 마찬가지다.

사라져 가는 것들, 져가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밤이 시작되기 전 모든 게 가라앉는 그 아름다운 순간 고민이나 두려움을 하찮게 만들어준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딱 이맘때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서, 엄마는 시어머니와 사는 삶을 끝내고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독립을 맞이했고 나는 새로운 동네, 새로운 학교를 맞이했으며 내 인생에 꽤 큰 전환점이 됐다.

알코올 의존증이 심했던 아버지 밑에서 이유 없이 맞고 쫓겨나고 그럼에도 나를 보살펴주기를 바랐던 이중적인 마음이 고스란히 자라났던 그 옛날 집을 과거로 훌훌 털어버린 날이기도 했다.

아마 그때 아빠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된 상태였어서 나와 엄마, 동생 셋이서만 이사를 왔던 것 같다. 아빠가 겨우 술을 끊고 새로운 집으로 들어와 거의 2년 만에 어색한 만남을 했던 건 하필 사춘기 시절이었다.

그런 수많은 변환 과정에 놓여있었던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그래서인지 가을만 되면 똑같이 찾아온다.

이상하게 가을만 되면 뭔가 마음이 이상했던 건 그때의 강렬했던 경험들 덕분이겠지.

그때도 이렇게 낙엽을 봤던 것 같고, 올해 가을도 어김없이 마음이 이상하다.

하지만 왜 이상한지를 알고 나니, 새로운 점이 보였다.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에 놓여있던 그때, 꿈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철없고 순수한 사춘기 시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나는 늘 그때의 나일 것이다. 상황은 언제나 변하고 감정과 생각, 꿈과 목표, 인연과 마음은 날씨처럼 짓궂고 하루도 같은 날이 없겠지만 나는 언제나 나였고 지금도 나이고 앞으로도 나일 것이다. 꿈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 그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가졌다고 착각하는 모든 것은 지금의 육신을 포함해 다 빌린 것들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영원히 '소유'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영원히 의미를 찾으며 배우고, 깨달아가는 과정 끝에는 또다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를 마주하는 때가 온다. 아마 내가 죽을 때쯤이면, 대충 90살쯤이면, 원하는 일도 해보고 돈도 충분히 벌어보고 사랑도 해보고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여행도 여러 군데 다녀봤으니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공허하고도 뿌듯하게 옅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마치 과거에 겪은 모든 일들이 뿌연 안갯속 꿈이 되어버린 것처럼. 또다시 꿈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때 사춘기 시절의 내가 되어 육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영혼이 되겠지. 이렇게, 나는 언제나 나다.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다는 말이 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나는 오늘 눈을 감고서 꽃봉오리를 보았다. 꽃이 활짝 피기 전, 꽃잎을 모아 다물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가 자라나고 준비되고 있는 꽃봉오리. 인간과 자연은 참 많이 닮아있다. 모두 우주에서 떠돌던 먼지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은 생명에서 시작된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겠지. 인간이 배움과 경험을 통해 존재를 확실히 다지고, 사회에 나올 준비를 마친 뒤 적성에 맞는 일로 세상에 영향력을 펼쳐가는 이 모든 과정이 꽃을 닮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땅 속에서 씨앗 상태로 잘 버티고 있다가, 때가 되면 땅 속에 뿌리를 내려 자라나고 꽃으로 피어난 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꽃가루를 뿌리고 또다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내는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을 닮았다. 꽃도 인간도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세상에 기여가 된다.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나는 과거의 고통들을 끝낼 준비가 된 것 같다. 어릴 적 당했던 학대도, 나를 평생 괴롭혀왔던 그 아빠라는 존재도, 내가 겪은 모든 억울하고 상처가 됐던 일들도. 다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온 것들이었다. 난 충분히 배웠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배울 것이다. 또다시 과거를 털어버려야 하는 순간이 올 것임을 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험하고 배워야 하는 존재니까. 배우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감사하는 것만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끝이다. 끝은 시작과 같은 의미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우린 배우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제 아빠를 용서할 수 있게 됐다. 그가 아무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도 그저 인정받기를 원할 뿐인 나약하고 안쓰러운, 나와 같은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만 25살이 되던 해, 2023년이었다. 꽃을 피울 준비가 됐던 그때.


콜 : 이 세상엔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
앤 : 세상이 네게 뭘 주는지가 아니라 네가 세상에 뭘 주는지가 중요해. 넌 참 많은 걸 줬어. 잘 해결해보자, 응?
- 드라마 빨간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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