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언니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유일한 법적 보호자다.
법원에서 지정한 변호사를 해임하기 위해서는
언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작은 실수로 인해,
변호사는 이 사실을 눈치채 버렸다.
그날 이후, 평소 조력자 관계로 보였던
변호사와 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해임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법적 보호자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제는 아예 나를 피하기까지 했다.
도우미가 수차례 전화를 걸고,
여러 차례 방문 일정을 조율한 끝에야
그는 마지못해 할머니 댁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도우미에게
나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날 이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쓸쓸하게 들렸다.
할머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언니 또한 노환으로 인해
조금씩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던
‘내가 새로운 법적 보호자가 되는 일’은
이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다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지는 순간을,
그 손끝에서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감각’을
다시 피어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며칠 뒤면 도우미의 계약도 끝난다.
처음에 왔던 도우미가 다시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들은 보통 4주에서 6주 단위로 계약을 갱신한다.
이렇게 자주 사람이 바뀌는 것은
결코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은 독일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드리지도 못한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멍하니 TV를 바라보신다.
남아 있던 한쪽 눈의 시력마저 점점 흐려지고 있어
사실 화면을 알아보지 못하신다.
오직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신다.
혈압은 낮아지고,
“자꾸 졸리다”는 말을 반복하신다.
거동 역시 점점 불편해져 간다.
인간이 늙어간다는 것은,
이렇게 조금씩 세상과 멀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씁쓸하고, 서글프고,
어쩐지 나까지 늙어가는 기분이 든다.
세상적인 일은 모두 내려놓고,
그저 할머니의 남은 여생이
조금이라도 덜 쓸쓸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드리는 것.
그게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가장 조용하고도 확실한 역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