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수업을 처음 들었다. 혼자 글을 쓰다가 재능의 한계를 느낀 것이 계기였다. 몇 십만 원을 태워서라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나는 곧바로 사설 학원 주말반을 신청했다. 온라인 대신 오프라인을 택했다. 조금 유치한 고백이지만, 사실 소설을 배우는 것과 별개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일전에 사귄 친구들은 모두 글과 사이가 멀었다. 글쓰기와 관련 없는 전공을 배운 탓에, 뒤늦게 관심사가 울타리 너머 뜬금없는 방향으로 튀어버린 탓이었다. 관심사가 벌어지니 이전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글을 쓸 새 친구가 필요했다.
그런 인연을 만날 야심을 품고 수업에 왔다. 첫날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수강생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삐 문 밖으로 나갔다. 나와는 달리 예정된 약속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괜스레 외로워졌다. 마음 제대로 표현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짝사랑을 겪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친구 사귀기는 글렀다. 수업 기간도 4주로 짧은 편이었고, 미련 없이 바쁘게 흩어지는 사람들의 걸음을 붙잡을 용기가 부족했다. 그래, 글은 혼자 쓰는 거랬지. 아쉬움은 책상에 널브러진 짐과 함께 가방에 욱여넣었다.
4주가 지난 후 연계 클래스가 새로 열렸다. 유독 눈에 들었던 한 수강생을 다시 만났다. 그땐 낯선 사람들 중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불쑥 낯가림을 털어낼 용기가 샘솟았다.
“안녕하세요. 단톡방에 초대되셨을 때 익숙한 분이라 반가웠어요.”
그 인사 한마디로 우리는 저녁을 같이 먹었다. 인사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다가 과제 피드백을 공유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마지막 수업 과제는 엽편이었다. A4용지 한 두장 분량의 짧은 글을 제출하면 선생님께서 코멘트를 남겨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피드백을 나눠 읽고, 서로의 생각도 꼼꼼히 적어 돌려주었다. 내가 바라던 글 친구와의 새로운 놀이였다.
그는 비문을 재구성해 단단하게 엮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활자로 쏟아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이 문장을 지저분하게 했다. 그는 내가 어질러둔 문장을 깔끔히 정돈해 주었다. 이야기 구조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긍정적 변화를 더 선명하게 묘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좋아하니까요.
그의 피드백에 대부분 감탄했으나 그 말만은 쉽사리 동의하지 못했다. 고집인지 줏대인지 모를 어떤 돌덩이가 대답이 튀어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저 아, 네. 얼버무렸다.
아직도 누군가의 지적에 방어적인 태도를 지닌 걸까? 돌이켜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가 내 글에서 오점을 찾을 때마다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마지막 피드백에는 말을 잇지 못했을까? 집에 돌아왔을 땐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짚어봤다. 내가 글을 쓰는 감정은 무엇일까. 글은 삶을 대변하기도 한다던데,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여러 물음표들을 곱씹은 뒤에야 그의 말에 머뭇거렸던 공백을 메꿀 수 있었다.
피드백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완벽한 해피엔딩은 싫어요. 제가 느낀 삶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어떤 사건이 끝나도, 선이 딱 그어져서 단번에 행복해지지 않아요. 그저 깨닫고 받아들이고 버틸 뿐이죠. 그 긴 과정이 멀리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꽤 행복했다고 알아차릴 뿐이죠.
그래서 이전과 다를 미래의 감정은 인물의 몫으로 놓아두는 걸 좋아해요. 그저 당연히, 분명히 좋은 쪽으로 더 나아가리라 믿어줄 뿐이에요.
제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렇게 소설 속 인물을 응원해 주길 바라요. 인물을 믿고 바라보며 단단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쓰다듬을 수 있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