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사진장이 Sep 16. 2021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 한 장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 #17

'사진에 미친놈' 소릴 쫌 들을 무렵, 나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카메라 하나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곤 했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후배들은 주로 "아기 사진을 찍어주려 하는데 어떤 카메라를 사면 좋을까요?"를 궁금해 했고, 나이든 선배들은 "요즘 내가 여행에 취미를 붙였는데, 멋진 풍경사진 찍으려면 어떤 카메라가 좋겠나?"를 궁금해 했다.


한창 사진에 미쳐있던 시기였고, 그와 비례해 장비 욕심이 하늘을 찌를 때라 그땐 나름 맞춤형 추천이 가능했다. 당시 나는 새로 발표되는 최신형 카메라들과 좋은 렌즈들에 관심이 열려 있었고, 자연 추천을 원하는 사람들 상황에 맞는 카메라를 골라내는 일은 인터넷 클릭질 몇 번만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카메라에 대한 관심이 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카메라가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도 그냥 그런가 보다 시큰둥하게 지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카메라가 중요하지 않아진 건 아니었지만, 내가 지향하는 사진에선 카메라가 주연이 아니라 조연에 불과하단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까닭이다.


사람 사는 냄새 물씬 풍기는 사진을 지향하는 나로선 세상 속으로, 그리고 사람들 속으로 한 걸음 가까이 들어가는 게 더 중요했다. 좋은 카메라 장비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나의 관심사는 어떤 카메라를 쓸 건가 보다는 어떻게 하면 세상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좀 더 다가들 것인가 하는 문제에 쏠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서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그 안으로 녹아 들어가길 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소위 '뽀대나는' 플래그십 카메라는 오히려 방해물이 된단 판단이 들었다. 그런 걸 들고 다니면 공연히 사람들 마음만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나라는 사람보단 카메라에 더 눈길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때부터 DSLR을 버리고 눈에 덜 띄는 미러리스를 곁에 두기 시작했다. 플래그십 DSLR에 비해 성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사람들에게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가는덴 그 편이 훨씬 나았다. 가벼운 카메라 가방도 하나 준비해 항상 손에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그 안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늘 굶주린 표정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돌아다니는 하이에나 모습에서 발톱을 감춘 채 먹이 주변 정찰비행부터 시도하는 맹금류로의 변신을 꾀했다고나 할까?


이와 병행해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가성비 좋은 똑딱이 카메라도 서브용으로 하나 장만했다. 직업 사진가가 아닌 까닭에 항상 카메라 가방을 메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보니 눈 앞에서 정말 아까운 순간을 놓치는 일들이 간헐적으로 발생했는데, 그걸 방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해 놓고도 칠렐레 팔렐레 빈 손으로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가 '신의 손'이라 이름 붙인 아래 사진 역시 하필이면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미러리스와 서브용 똑딱이까지 모두 집에 놓고 나간 어느날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었고, 급한대로 들고 있던 스마트폰 카메라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건진 작품이다.



대전현충원으로 아버지 성묘를 갔다가 돌아오던 중 대전 월드컵경기장 근처를 지나는데, 문득 예사롭지 않은 구름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에 드리워진 거대한 신의 손을 연상케 만드는 구름이 땅 위의 뭔가를 움켜잡으려는듯 펼쳐진 형상이었다.


마침 신호 대기로 잠시 차가 멈춰서 있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한 장 담았다. 비좁은 차 안에서 유리 반사광을 무릅쓰고 몸부림치다시피 어렵게 찍은 터라 사실 사진 퀄리티를 따지면 아쉬움이 매우 크지만, 악조건 속에서 그 순간을 '기록'하는덴 성공했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사족이 너무 길었는데, 이 사진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카메라는 지금 바로 내 손에 들려있는 카메라'라는 얘기다. 줌이나 망원이 지원되건 안 되건, 화소수가 백만이든 천만이든 관계없이 그 어떤 카메라라 하더라도 꼭 뭔가를 찍어야 할 순간에 직면했을 때,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카메라가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라는 사실이다. 플래그십 DSLR 카메라보다도, 독일 명품 라이땡 카메라보다도 더 좋은 카메라는 다름 아닌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그 카메라란 얘기다.


사진의 본질은 찰나의 순간을 카메라로 담는 거다. 그 카메라가 어떤 카메라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 찰나를 잡을 수 없는, 집에 두고 온 카메라는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 할지라도 아무 소용없는 쇳덩이일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하마터면 아내와 형사사건으로 엮일뻔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