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아내와 형사사건으로 엮일뻔 했다
소소잡썰(小笑雜說)
한때 나로 하여금 진저리를 치게 만든 별명이 하나 있다. '백수'라는 별명이 바로 그것이다. 흰 백(白)자, 머리 수(首)자 백수다.
이쯤 얘기하면 대부분 짐작들을 하겠지만, 나는 흰머리가 매우 많은 편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검은 머리가 흰머리보다 현저하게 적은 편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20대 중반부터 하나둘 검은 머리들 틈새에 흰머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니만, 2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아예 정권교체를 해버렸다.
흰머리가 얼마나 많았던지 장난끼 넘치는 아내는 한 때 이걸 갖고 용돈벌이 구상을 한 적도 있다. 하나당 10원씩만 받아도 떼돈 벌겠다며 신바람을 내더니만 "자네, 흰머리 한번 뽑아볼 생각 없나?" 하고 옆에서 변죽을 올리곤 했던 것이다.
내가 성격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정말 형사사건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던 발칙한 도발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많은 사람에게 흰머리를 뽑아주겠다는 건 대머리를 만들어 버리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많이 참았다.
회사 동료들 중에도 이 흰머리를 갖고 농담을 건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악의 없는 농담이긴 했지만 흰머리에 콤플렉스를 지닌 예전에는 그런 악의 없는 농담조차 내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잘 생긴 놈에게 못 생겼다 놀리는 건 농담이지만, 못 생긴 놈에게 못 생겼다 놀리는 건 농담이 아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염색으로 문제의 흰머리를 가려보려 했던 적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같은 시도는 불과 몇 개월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흰머리는 가려졌지만, 예민하디 예민한 내 피부가 염색약 기운을 못 이겨 온통 벌겋게 뒤집어져 버리는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그냥 생긴 대로 편히 살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남들은 한번 튀어보겠다고 비싼 돈 들여 일부러 빨강머리 노랑머리 흰머리로 염색도 하고 사는 시대에 돈 안 들이고 나만의 개성을 살린 염색을 했다 생각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많은 게 달라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줘 단번에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점 등 흰머리의 장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음을 바꿔 내 흰머리를 트레이드 마크처럼 활용하다 보니 "멋쟁이시네요", "염색하신 거예요?" 따위 반응조차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큰 사고로 외모가 매우 흉칙해진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이에 굴하기는커녕 이 같은 자신의 남다른 외모를 마케팅 쪽에 최대한 활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섬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읽으며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머리를 끄덕거렸는데 직접 해보니 과연 그랬다. 콤플렉스를 콤플렉스로 느끼는 대신 자신을 차별화하는 수단으로 잘 활용한다면 이는 오히려 삶에 큰 보탬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때 내게 콤플렉스로 작용했던 흰머리는 그렇게 지금은 내 트레이드 마크가 돼 있다. 흰머리 덕분에 멀리서 뒷모습만으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반갑게 내게 인사를 건네오고 있고, 한번 만난 적은 있으나 너무 오래돼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사람들도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거의 예외 없이 반갑게 먼저 아는 척을 해오고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갖게 됐던 내 흰머리 콤플렉스는 한번 마음을 고쳐먹은 뒤로는 이렇듯 내 삶에 적지 않은 보탬이 돼오고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 요즘같은 자기PR 시대에 결코 단점이 될 수 없다. 성형미인이 판을 쳐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시대다 보니 오히려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경쟁무기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 한번 알려보겠다고 방송이고 유튜브고 나와 다들 온갖 생지랄(?)들을 떠는 시대에 그냥 가만히 얼굴 들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나를 각인시킬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개이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