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환으로 몸이 약해지면서 돌아가시기 한 두 해 전부터 우리 아버지는 집에만 계시는 날이 많아졌다.건강할 때는 집에 가만히 있는 걸 그렇게 못 견뎌하시던 분이 백팔십도 달라진 것이다.문제는 집 밖 출입을 멀리하면서 가뜩이나 약해진 건강이 점점 악화일로를 걸었다는 거다.
보다 못해 "힘드신 건 알지만 운동 삼아 쉬엄쉬엄 동네 한 바퀴씩 돌고 그러세요" 하고 틈날 때마다 권했지만,아버지는 말로만 알았다고 하실뿐 통 집 밖으로 나가려 들지 않으셨다.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통 못 걷겠다는 게 아버지의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몸이 힘든건 사실이지만, 아버지 몸이 못 걸을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사실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으면 동네 한 바퀴 정도는 충분히 돌 수 있는 정도였다.
어머니한테 이런 내 생각을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 역시 같은 의견이셨다.그래서 아버지께 "지팡이 하나 사다 드릴테니 동네 한 바퀴씩 도세요" 하고 권했는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단박에 싫다고 거절을 하셨다. 왜 싫으시냐 여쭈니 "지팡이 짚으면 노인네 같아서 싫다"고 답하셨다.
어이없는 대답에 좀 울컥하는 느낌이 들면서 '80 넘으신 분이 노인이지 그럼 뭡니까?' 하는 말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나는 궁리를 달리 하기로 했다. 노인네 같아서 싫다는 아버지 의견도 존중하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도시게 만들 대안을 찾기로 한 것이다.그 결과 지팡이는 지팡이지만 노인네 같지 않은 지팡이를 구해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때 눈에 들어온게 화려한 컬러와 세련된 디자인을 겸비한 등산용 스틱이었다. 3단 4단으로 접히는 요술지팡이 같은 기능성까지 갖춘 제품이라면 호기심 많은 아버지 마음을 분명 충족시켜 주리라 판단됐다.아니나 다를까, "이건 노인네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등산할 때 쓰는 거"라는 설명과 함께 최신상 등산 스틱을 구해다 드리자 아버지는 매우 만족해 하셨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걸 들고 동네를 한 바퀴씩 돌기 시작하셨다.
산책 중 누군가 아는 척이라도 해오면 "우리 막내놈이 됐다는 데도 이런걸 사다주며 귀찮게 해서..." 하며
굳이 묻지도 않은 자랑 같은 대답을 슬쩍 흘리는 건 필수옵션이었다.그런 추억 때문에 나는 요즘도 길을 가다가 등산 스틱 든, 혹은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을 볼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90을 바라보는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노인네'가 되길 거부하셨던, 특히나 자식들 앞에선 늙어 꼬부라진 모습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으셨던 '꼿꼿한' 아버지가 문득문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