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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Oct 22. 2021

네비놈을 백퍼 믿으면 안되는 이유

소소잡썰(小笑雜說)


네비게이션 없이 낯선 목적지를 찾아가는 게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우리가 워낙 네비에 길들여져서 그렇지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팔도지도책 한 권 달랑 들고 낯선 길을 찾아가는 운전자가 대부분이었다. 아내로부터 "예전엔 모르는 길도 척척 찾아가더니만 네비 들여놓은 뒤론 우리 남편이 길 바보가 됐다"는 핀잔을 듣곤 하는 나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얼마 전 휴일을 맞아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해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가기 위해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을 때 일이다. 꽤 자주 다닌 길이라 머릿 속으로 경로가 훤히 다 그려졌지만, 그래도 굳이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한 뒤 안내시작 버튼을 눌렀다.


다른 친구들 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네비만 놀고 먹는 꼴은 못 봐주겠다든가 하는 꼰대병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 생기는 도로들도 많고, 요즘은 실시간 교통량을 점검해 안 막히는 길로 안내해주는 인공지능까지 추가된 터라 아는 길도 네비한테 물어 가는 게 유리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쯤 가다 보니 네비가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새로운 길이 생겼거나 그게 아니면 평소 다니던 길에 교통정체가 발생한 모양이라 판단됐다. 그래서 별 망설임없이 바로 네비가 안내하는 다른 경로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평소 다니던 자동차전용도로에 비해 신호등도 많고 차량 통행량도 좀 많은 편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현대과학이 낳은 문명의 이기들에 대해 남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터라 네비가 알아서 잘 판단했을 거라 믿은 거다. 그런데 그렇게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셔~' 열심히 가다 보니 문득 낯익은 도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원래 다니던, 그리고 가려고 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네비란 놈이 갖고 있는 또 다른 특성 하나를 기억해냈다. 숫자상 단 영점 몇 킬로미터라도 가까운 경로가 있으면 죽어라 그 길을 고집하는 '똥고집'을 갖고 있다는 거였다. 그게 러시아워로 꽉 막힌 시내를 관통하는 길이건 신호등이 줄줄이 가로놓인 중심가 도로건 관계없이 단순히 숫자에만 집착하는 못된 버릇이 네비놈에겐 있는데, 내가 그만 그걸 깜빡하고 말았다.


덕분에 과거 부산 같은 낯선 대도시 인근을 지나는 길에 안 해도 될 개고생을 몇 번이나 한 경험도 있었다. 애당초 외곽도로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코스였는데, 모르는 길은 그저 네비가 가라는 대로 가야 한다 믿었다가 생긴 해프닝이었다. 딴엔 최단 거리로 안내한답시고 네비란 놈이 러시아워로 꽉 막힌 부산시내로 안내하는 걸 곧이 곧대로 따라간 건데, 덕분에 예정에도 없던 부산 시티투어를 하며 내가 얼마나 이를 갈았던가는 굳이 지금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왼쪽 차로로 차선을 변경하고 싶으면 오른쪽 깜박이를 켜 다른 운전자들의 방심을 유도한 뒤 재빨리 차선을 변경해야 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힙한' 부산시내 운전연수를 무료로 받은 건 덤이었다. 덕분에 차선을 변경하려고 깜박이만 켰다 하면 몇십 미터 뒤에 있던 옆 차로 차가 순식간에 내 옆구리까지 와있는 이적을 나는 없이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네비 관련 에피소드 하나가 문득 생각난다. 네비가 우리나라에 갓 보급되기 시작했을 무렵 사연으로 추정되는데, 그 내용을 추려보면 이렇다.


길치인 할아버지와 길 빠꼼이 할머니 부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주 다니는 길도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아 할머니가 곁에서 늘 길을 알려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가 차에 네비를 들여놨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예쁜 여자 목소리로 척척 길을 안내해 주니 할아버지는 매우 좋아했다. 마치 심봉사가 눈을 뜬 느낌쯤 됐을 거다.


반면 할머니는 새로 들여온 네비가 영 못마땅했다. 네비를 들여온 뒤론 영감이 자기 말보단 네비 말을 더 신봉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여서 왼쪽!" 하고 알려줘도 옆에서 네비가 "잠시후 우회전 하세요" 하면 할아버지는 영낙없이 오른쪽 길로 가곤 했다. 일종의 라이벌 아닌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거다.


그러던 어느날, 이날도 할아버지는 '좌 네비 우 할멈'을 거느린 채 길을 가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왔을 때 할머니는 "여서 왼쪽!" 하고 외쳤는데, 네비는 "잠시 후 우회전 하세요" 하고 반대쪽을 가리켰다. 할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네비 안내를 따라 우회전을 했고, 얼마 후 목적지와는 동떨어진 막다른 길과 마주서고 말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할머니는 아주 쌤통이라는 듯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할멈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죽어라 젊은년 말만 듣더니 꼴 조~오타!!!"


첨단과학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한 네비 같은 기계장치들이 여러 측면에서 사람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만든 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란 존재 자체가 완벽치 않은데, 그런 사람이 만든 피조물 따위에 완벽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네비 같은 기계장치들을 유용하게 잘 활용하되 백퍼 기계에만 의존하거나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느님이 만든 우리 인간들조차 이토록 불량 투성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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