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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Dec 13. 2021

4남매 자식 땜에 400배는 힘들었을 울 아버지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65

우리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공장의 경비원이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이라 일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고,

국민학교도 채 졸업 못했을만큼 배움이 짧았던 데다가

6.25전쟁 통에 한쪽 팔을 다쳐 몸까지 불편했던 아버지로선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는 경비원 일에 그 누구보다 열심이셨다.

3교대로 일하느라 낮밤이 뒤바뀌기 일쑤였지만 힘들다는 불평 한 마디 없으셨고,

불편한 팔 때문에 일 못한다 소리 들을까 봐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려 노력하셨다.

하지만 경비원이란 직업은 생각만큼 그리 녹녹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회사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학교를 오가며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추운 겨울 같은 때는 한번씩 그곳에 들러 경비실 톱밥 난로에 언 몸을 녹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오며가며 볼 땐 그저 제복을 입고 호루라기를 불며 큰소리치는 수문장 같은 느낌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비원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큰소리치기는커녕 들고 나는 회사 직원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느라 바빴다.

어린 나는 '왜 나이 많은 아버지가 젊은 직원들에게 저렇게 인사를 할까?' 하고 궁금했지만,

왠지 물어봐선 안 될거 같아 속으로만 그 물음을 삼키곤 했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 덕분에 그 시절 아버지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다.

우리 회사에선 코로나 사태를 맞아 기존 경비원 근무체계에 더해 관리부서 직원들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관리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나 역시 회사 출입문 가운데 한 곳을 맡게 된 까닭이다.

열화상 카메라와 체온계 측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조치를 취하는게 내 임무였다.


처음엔 며칠 이러다 말겠지 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지원근무에 나섰는데, 상황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코로나 비상사태는 예상 외로 길게 이어졌고, 자연 회사 출입문을 지키는 나의 임무도 계속 연장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어린 시절 보았던 경비원으로서의 아버지 모습들을 기억해냈다.


경비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했을뿐임에도 조금만 비위가 상하면 반말지꺼리로 화를 내는 사람들,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에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 융통성이 없다"며 빈정거리는 사람들 등등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온갖 상황과 사람들이 속을 썪어 문들어지게 만드는 속에서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묵묵히 참고 넘어가야만 하는 순간들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열화상 카메라 위치가 바뀌어 몇 발자국 더 걷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아침부터 재수없게..." 하며 다짜고짜 화를 내는 사람,

체온이 위험수치인 37.5도를 넘어 귀가를 권고하자 "니가 내 월급 책임질거냐?"며 막말을 일삼는 사람 등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들과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는 '그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곱씹곤 했다.


일자리가 많지 않던 시절, 배움은 짧고 한쪽 팔마저 불편해 달리 갈 곳도 마땅치 않았던 아버지는

그래서 그만큼 더 많이 참으셔야 했을 거고, 그래서 더 아프고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에 4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책임져야 하는 어깨 무거운 아버지였기에

남들보다 4배, 아니 40, 400배쯤 더 아프고 힘드셨을 거고, 그래서 그만큼 더 많이 외로우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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