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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Dec 31. 2021

정년퇴직 선배를 박장대소케 만든 카톡 한 줄

소소잡썰(小笑雜說) -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한 해 업무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근무일, 사무실 한 편에서 난데없는 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침 한가하고 심심하던 터라 웃음소리 주인공에게 무슨 재밌는 일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휴대폰을 가리키며 팀 단톡방을 한 번 보라고 했다.


그곳에는 정년퇴직을 맞은 선배직원을 중심으로 팀원들 간에 이런저런 인사말과 덕담이 한창 오가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도와주신 후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는 퇴직 선배의 작별 인사말에 "신입 때부터 선배님께 많은 도움 받아왔는데 벌써 정년퇴직이시라니 서운합니다", "건강하시고 퇴직 후에도 하시는 일 모두 잘 이뤄지길 바랍니다"는 답글들이 주거나 받거니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의 난데없는 큰 웃음을 유발한 건 마지막 줄에 달린 동료직원 A의 답글이었다. 평소 사무실 내에서 별로 말이 없는 편인데다가 단톡방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는 그가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서 서운합니다" 하는 '야릇한' 답글을 단 거다. 아마도 남달리 가까웠던 선배가 정년퇴직을 한다니까 감회 역시 남달라 모처럼 한 마디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평소 잘 하지 않던 짓을 하려다 보니 그만 스텝이 꼬인 듯했다.


행간을 감안해 해석하자면 <오랜 시간 함께 해서 즐거웠고 큰 도움이 됐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돼 서운합니다> 정도 될 터였다. 그런데 운동을 잘 안 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축구 경기 같은 데 참여하게 되면 몸보다 마음이 앞서 나가는 바람에 일쑤 스텝이 꼬여 넘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의욕 과잉으로 단순히 말이 좀 꼬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동네에나 하이에나 몇 마리쯤은 있게 마련이고, 나도 그 중 한 마리였다. 맛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썩은 고깃덩이가 코앞에 던져졌는데 그걸 물어뜯지 않으면 하이에나가 아니었다. A의 답글로 인한 사무실 내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 무섭게 발빠른 하이에나 B가 단톡방 화면을 펼쳐든 채 정년퇴직 선배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나 역시 그 뒤를 이어 쫓아갔다.


"선배님 선배님, 이것 좀 보세요" 하고 이르듯 고하는 B의 말에 정년퇴직 선배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미 자기도 봤다는 의미였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구요" 하며 그 옆에서 순진하게 변명하는 A의 당황한 모습도 재밌거니와, 그걸 또 굳이 이르겠다고 쪼르르 달려온 B의 재롱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정년퇴직하는 선배 앞에서 후배들이 한바탕 재롱 떠는 상황으로 판이 훈훈하게 마무리될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결말은 눈꼴 시려 못봐주는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봐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국문학과 전공자인 제가 봤을 땐 말입니다..." 하고 잽싸게 끼어들었다. "국문학도이자 심리학 부전공을 한번 해볼까 1분쯤 고민해 본 경험이 있는 제 전문가적인 견해로 봤을 때 이건 A씨 무의식 저 편에 깊이 숨어있던 본마음이 발현된 거라고 봅니다. 해석하자면 '선배, 오래 봐서 지겨웠다, 우리 이제 다신 보지 말자'쯤 되겠네요, 하하"하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서다.


그러자 순박한 A는 얼굴까지 빨개져 그게 아니라며 마구마구 손사래를 쳐댔고, 곁에서 그걸 구경하던 동료직원들은 "맞다, 딱 그 말이네. 역쉬 전문가라서 다르다 아이가 ㅋㅋ" 하며 일제히 맞장구를 쳐댔다. 정년퇴직을 불과 몇 시간 남겨둔 선배는 예기치 못한 후배들 재롱잔치에 박장대소하느라 의자가 거의 뒤로 넘어갈 정도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덕분에 자칫 무겁거나 어색할 수도 있었던 정년퇴직 선배와의 작별 인사는 웃음기 가득한 훈훈한 분위기로 잘 마무리됐다. 그 분위기에 적잖이 일조한 나를 모처럼 아주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매우 자~알...


아무쪼록 오늘을 마지막으로 반평생 동고동락한 직장생활을 마무리짓는 대한민국 모든 정년퇴직 선배님들의 앞날에 무궁한 건강과 행복한 은퇴생활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문구처럼 반평생 온몸 던져 열심히 일하셨으니 이젠 남은 인생을 열심히 '누리고'들 사셨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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