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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Apr 27. 2022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

소소잡썰(小笑雜說)

"어릴 때요, 서른여덟 정도 먹으면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모든 일에 정답을 알고, 옳은 결정만 하는 그런 어른이요.

근데 서른여덟이 되고 뭘 깨달은 줄 아세요?

결정이 옳았다 해도 결과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런 것만 깨닫고 있어요"


"마흔여덞 정도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아, 이거 스포일러인데... 옳은 건 뭐고 틀린 건 뭘까?

나한테 옳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도 옳은 것일까?

뭐 나한테 틀리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도 틀리는 걸까?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중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마음 맞는 사람끼리만 한 공간에서 같이 근무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번씩 해보곤 한다. 아마도 그 확률은 99.999%의 사람들에게 제로일 거라고 확신한다. 설령 그가 모든 직원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는 대표이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동안 이십몇 년 간 회사 생활을 해왔지만, 단 한 번도 눈에 거슬리는 사람 없이 일해본 경험이 없다. 윗대가리들은 윗대가리들대로, 아랫대가리들은 아랫대가리들대로 문제 있는 인간들은 하나둘씩 꼭 있었다. 물론 나 역시도 다른 누군가에겐 그런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8~90% 이상의 사람들은 상식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세상에 내 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는 법이니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는다. 문제는 이 8~90% 바깥에 위치한 상식적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최근 그 바깥 범주에 속하는 사람 하나가 내 주변에 생겨났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생겨났다>가 아니라 <나타났다>고 하는 편이 옳을 거다. 원래 있던 존재인데 최근 있었던 사무실 내 자리배치 변경으로 인해 내 코앞으로 불쑥 나타난, 혹은 존재감이 불거진 사람이니 말이다.


A라는 내 나이또래 동료가 바로 그였다. 그는 원래 외근 업무를 주로 해서 사무실 내엔 책상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일을 할 땐 항상 밖에 나가 있고, 회사 내에 있을 땐 잠시 쉴 수 있는 휴게공간 같은 게 따로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 올 일이라곤 며칠에 한 번 꼴로 업무 보고를 하러 올 때 외엔 없었다. 페이퍼리스 업무환경이 구축된 몇 년 전부터는 그 업무 보고조차 전산시스템으로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그것도 하루에 몇 차례씩 사무실로 꼬박꼬박 출근하곤 한다.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는 성격 때문이다. 혼자 있는 것도, 수다 떨 상대가 없는 것도 못 견디는 성격이다 보니 누군가 같이 수다를 떨며 놀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불행히도 그 상대는 최근 자리배치 변경으로 인해 내 옆으로 옮겨온 B라는 동료였다.


A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기 심심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B 자리 옆에 주저앉아 수다를 떨어댔다. 한 번 앉았다 하면 기본이 30분이었고, 어떨 땐 한 시간 넘도록 잡담을 늘어놓곤 했다. 처음엔 '하루이틀 저러다 말겠지. 저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만날 저러겠어'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이 같은 일상은 계속 반복됐다. 덕분에 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주식투자 종목과 앞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차종까지 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귓등으로나마 강제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평상시에도 그의 수다 떠는 소리가 달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한창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 옆에서 그러고 있는 건 정말 최악이었다. 갑자기 스트레스가 확 올라오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일쑤였고, 어쩌다 한 번씩 불쑥 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며 친한 척을 해올 땐 정말 한 대 줘패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참다 못한 나는 "당신 이거 엄연히 업무방해야, 알아요? 계속 이딴 식으로 옆에서 시끄럽게 업무방해하면 내가 확 고발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하라구요" 하고 경고했다. "그렇게 사무실에 오는게 좋으면 여기 옆에 A씨 책상 하나 놔줄 테니까 와서 앉아 일을 하던가요" 하고 협박도 해봤다. 맘 같아서야 쌍욕을 곁들여 샤우팅하듯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다른 동료들 보기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이 벌어질까 봐 억지로 웃는 낯을 지은 채였다.


그런데 그냥 쌍욕을 하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웃는 낯으로 전한 내 경고메시지 정도는 그의 마음에 전혀 가닿질 못한 듯했으니 말이다. A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무 일 없단 얼굴로 B의 자리를 찾아왔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수다를 떨며 놀다가곤 했다.


더 이상 참다간 홧병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 날을 잡아 B를 불러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고, 특히 수다라는 건 맞장구쳐 줄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거니 A의 상대방인 B를 설득하는 게 더 빠를 거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B는 적어도 남 평판이란 걸 신경쓰고, 남한테 폐 안 끼치려 노력하는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됐다.


B와 마주앉은 나는 우선 내가 최근 A 때문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얘기해줬다. 이어 "휴게실도 아닌 당신 자리에서 매일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떠는 건 업무 차질 발생은 둘째 치고라도 상사나 선후배들 눈에 과연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참다 못해 내가 결국 이 문제로 A와 사무실 내에서 대판 싸움이라도 벌이게 되면 그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인 당신 역시 입장이 편친 못할 거라고도 얘기했다. 그러자 B는 자기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며 A를 설득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느날처럼 A가 놀러오자 B는 재빨리 소매를 잡아끌며 그를 휴게실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B는 혼자 자리로 돌아왔다. 이후 하루 내내 A는 다시 사무실 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다행히도 대화와 설득으로 일이 잘 마무리된 듯 싶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성급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었는진 몰라도 B의 노력이 효과를 거둔 건 딱 하루에 불과했다. 이튿날 아침 A는 평상시와 같이 다시 B의 자리로 놀러왔고, 여전히 한참 동안이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늘어놨다. 그나마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온다는 것과 말소리를 평소보다 반 옥타브쯤 낮춰 소근대는 어조로 한다는 정도였다.


문제는 그게 더 내 스트레스를 증폭시켰다는 거다. 눈치를 본다는 건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방해가 되고 피해를 입힌다는 걸 안다는 의미인데도 배 째라는 듯 행동패턴을 바꾸지 않는 그의 낯 두꺼움에 화가 치밀었고, 딴엔 소음공해를 줄인답시고 소근대는 그의 말소리는 고요한 밤중에 천정에서 쥐가 집기둥을 갉아먹을 때 나는 사각거림을 연상케 해 진저리마저 쳐졌다. 층간소음에 한 번 귀가 트이면 바스락 소리도 천둥소리처럼 들려오 듯이 A의 소근거림은 정말 귀를 틀어막고 싶게 만들 만큼 나를 괴롭혔다.


얼마 전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를 보던 중 내가 인상 깊게 접했던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는 대사를 문득 떠올린 건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기본적인 직장 에티켓조차 지키지 않아 동료를 빡치게 만드는 A를 난 <개새끼>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어쩌면 반대로 내가 그 <개새끼>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A가 다른 동료 업무공간을 자기 전용 휴게실 정도로 잘못 알고 있는 무례한 <개새끼>인 건 분명 사실이지만, A 입장에서 바라보면 나 역시 똥개 새끼처럼 제 영역이라고 개폼을 잡고 앉아있는 <개새끼>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다. 잘잘못을 떠나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분명 <개새끼>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A처럼 무지하고 무례한 사람이 <개새끼>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나처럼 까칠하고 인간미 부족한 사람이 <개새끼>일 수도 있을 거다. 다만 차이는 그 누군가로 하여금 <개새끼> 소리를 마음 속으로만 되뇌이게 만드느냐, 아니면 기어코 입 밖으로까지 튀어나오게 만드느냐 정도일뿐... 혹은 좀 더 <개새끼>인지, 좀 덜 <개새끼>인지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어디선가 마음 속으로 나를, 우리를 향해 <개새끼> 소리를 곱씹고 있을 그 누군가들을 위해 매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통렬히 반성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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