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사진장이 Jan 10. 2022

부족했지만 넉넉했던 우리들의 밥상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69

우리 아버지 시대엔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게 있었다.

모든 사회 생활의 기초 단위인 집에서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밥상머리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졌던 건 어른에 대한 공경이었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드시기 전에 먼저 수저를 들면 안된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어른 먼저 드시게 해야 한다" 등이 그것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면 그분들부터 챙기라고 가르쳤고,

안 계시면 아버지 어머니부터 챙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요즘처럼 어른보다는 아이 좋아하는 반찬 위주로 상을 차리고

맛난게 있음 최우선적으로 아이에게 떠먹여주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밥상머리 교육에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도 중요시 여겨졌다.

"좋아하는 반찬이 있다고 해서 혼자만 다 먹으려 들어선 안 된다",

"국을 먹을 때 후르륵 거리거나 반찬 먹을 때 쩝쩝거려선 안 된다" 등이 그것이었다.

심지어 밥상머리에선 입 안 음식이 튈 수 있으니 대화도 삼가야 한다고 가르쳤었는데,

엄숙한 분위기보단 웃고 떠들며 밥 먹는걸 선호하는 요즘과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 당시엔 좁은 집에 대가족이 모여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4~5남매는 흔했고 7~8남매도 드물지 않다 보니 밥상머리가 늘 북적북적했고

넉넉지 않은 상차림으로 밥을 함께 나눠먹어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질서가 필요했다.

동작 빠르고 절제력은 부족한 어린 자식들과 나이 드신 부모님이 경쟁이 될 순 없었고

부득이 우선순위를 정해 밥상머리 평화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고나 할까?



온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에 대한 배려도 한몫을 했다.

집안의 가장이자 중심인 아버지가 잘 드셔야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할 수 있고,

그게 바탕 됐을 때 가족 공동체가 비로소 온전히 잘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고나 할까...


자식놈 입에 밥 한 숟가락 떠먹이려면 밥그릇 들고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핵가족 시대가 도래하면서

밥상머리 교육은 어느덧 구시대의 잔재가 돼 아련한 옛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밥상머리 교육 시대엔 집안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들의 자리 역시 점점 한편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가 그리들 바쁜지 한 밥상에서 같이 밥 한 끼 먹기가 힘들 정도라 밥상머리 교육 기회조차 거의 없어졌고,

함께 모여 밥 먹는 일이 점점 적어지면서 밥을 같이 먹는 사이라는 '식구'란 단어도 요즘은 잘 쓰지 않게 됐다.

안타깝게도 가족은 가족이되 식구라기엔 좀 부족한 관계로 서서히 변화돼 가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 안타까움 때문일까?

부엌 한 편 서구식 식탁과 의자에 앉아 혼자, 혹은 아내와 단 둘이 단촐하게 밥을 먹다가

TV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정답게 밥 먹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시절 아버지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오손도손 밥을 먹던 추억이 떠올라 그리움에 젖곤 한다.

때론 어린 자식이 밥이 부족해 살금 주변 눈치라도 살필라치면

마치 기다렸다는듯 "밖에서 뭘 좀 먹고 왔더니 배가 부르네" 하고 배를 두드리시며

"이거 더 먹어라" 하고 선뜻 밥을 덜어주던 아버지의 자애로운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