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잡썰

"안주 좀 처먹어라, 이놈들아!"

소소잡썰(小笑雜說)

by 글짓는 사진장이

내가 대학생활을 했던 80년대 중반엔 대학교 근처만 가도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찌르곤 했다.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는 군사독재 반대 시위를 진압한답시고 경찰들이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을 퍼부어댔기 때문이다. 우린 그걸 최루탄 남용에 따른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주변 땅들이 '최루토화' 돼 그렇다고 성토하곤 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물론 시위와는 전혀 관련없는 일반시민들도 대학교 인근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기 일쑤였다.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거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비싼 등록금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꼬박꼬박 학교에 등교해야 했던 우리는 그래서 이 최루탄 기운을 씻어낸다는 핑계 아래 대낮부터 인근 술집을 찾는 일이 잦았다. 신입생 때부터 죽어라 취업 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요즘 학생들에겐 정말 꿈같은 얘기일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핑계거리를 만들어 낮술까지 열심히 퍼마시고 다니던 시절, 서울 동숭동 대학로 주변에 친구들과 어울려 즐겨찾던 단골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워낙 안 좋던 시절이다 보니 학사주점만 해도 적잖이 부담스러웠던 터라 라면 한 그릇 혹은 떡볶이 한 접시 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렇게 가볍게(?) 한 잔 마시기에 부담없는 집이었다. 예를 들어 거기 딸려나오는 단무지 한 접시만 해도 소주 한 병쯤은 거뜬히 마시고도 남았으니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우리들 입장에선 정말 가성비 좋은 훌륭한 술집이었다.


더군다나 주인 아주머니 손맛이 예술이었고, 인심까지 후해서 가성비는 물론 가심비까지 아주 끝내줬다.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양 많은 집=맛집'이었던 배고픈 시절이라 그 집 음식이 정말 맛있었나에 대해선 좀 의문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가끔 안주가 좀 부족해 보이거나 부실해 보인다 싶으면 학생들 자존심 상하지 않게 "깨진 계란 버리기가 아까워 부쳐봤는데 한번 먹어봐" 하며 무심한 듯 슬쩍 건네던 서비스 안주 한 접시는 마음까지 따뜻하게 뎁혀주곤 했더랬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무슨 일 때문인가 필이 꽂혀서는 친구 한 명과 더불어 그 단골 분식집에서 대낮부터 술판을 벌였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처음엔 "가볍게 딱 한 잔만 하고 가자"로 시작했지만, 그 한 잔이 딱 한 잔으로 끝나는 법은 결코 없음을 술 좀 마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거다. 그렇게 떡볶이 하나를 안주랍시고 시켜놓고 시작한 술은 이내 본격적인 술판으로 이어졌고, 분식집 좁은 탁자 위엔 어느덧 빈 막걸리병 대여섯 개가 천불천탑처럼 우뚝 서있었다.


이때였다. 분식집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테이블 앞에 서서 혀를 끌끌 차더니만 사자후를 닮은 일갈을 날리셨다. "학생들, 이거 내가 장삿속에서 하는 말은 절대절대 아닌데 말야, 학생들이 정말 내 아들들 같아서 하는 말인데 말이지, 안주 좀 처먹어가면서 처먹어라 이 웬수같은 시키들아!"라고. 아마도 다른 손님들 주문을 받으러 오며가며 우리 테이블을 관심있게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 일갈을 듣고 알딸딸한 정신에 안주 접시를 내려다 보니 막걸리 대여섯 병을 비우도록 떡볶이 한 접시가 반 너머 남아 있었다.


아마 다른 친구와 함께였으면 그래도 떡볶이 한 접시 정도는 가볍게 해치웠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 대낮부터 술판을 벌인 나와 친구 모두 지독히도 안주를 안 먹는 인간들이었던 게 문제였다. 게다가 주종도 막걸리이다 보니 몇 잔 마신 뒤론 배가 불러서 안주에 전혀 손이 안 갔다. 결정적으로 두 인간 모두 평소 '술꾼 3원칙'이랍시고 '청탁불문(淸濁不問), 금전불문(金錢不問), 생사불문(生死不問)'을 좌우명처럼 외치며 살아온 놈들이었고, 술을 한 잔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선 안주를 삼가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입에 달고 다니는 놈들이었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 지켜봤을 분식집 주인 아주머니 입장에선 정말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밉상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땐 그런 이모 같고 삼촌 같은 음식점 주인들이 참 많았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을 자식이나 조카 대하듯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어하며 따뜻하게 품어줬고, 고향집 어머니처럼 밥 한 그릇을 퍼줘도 학생들에겐 꾹꾹 눌러 고봉밥을 만들어 내어주곤 했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게 배고픈 거라며 배 곯고 다니지 말라고 등을 토닥여줬고, 밥값 술값 떼이는 일이 비일비재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외상밥 외상술을 학생들에게 베풀곤 했다. 간혹 나와 내 친구 같이 좀 심하다 싶을만큼 깡술을 퍼마시는 놈들에겐 잔소리와 호통도 서슴지 않았고, 심할 땐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갈기기도 했더랬다.


요즘 세상을 보노라면 문득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곤 한다. 온기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키오스크 등을 통해 서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채 음식을 주문하고, 주문한 음식을 실은 배달로봇이 뽈뽈뽈 기어와 음식을 전달해주는 요즘 식당 풍경은 정확하고 실용적인진 몰라도 너무 삭막하기 그지없다. 어머니의 손맛 자리를 위생장갑이 대신하고 있는 요즘 음식점 음식들이 위생적인진 몰라도 그닥 입에 척척 감기진 않는 것처럼...


장사꾼과 손님 관계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만나서 사람 간의 따뜻한 온기와 정을 나누던 그 시절이 그래서 나는 그립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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