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에 울려퍼진 <꼰댓소리>
소소잡썰(小笑雜說)
한 가지 생각에만 너무 골몰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도 현실 감각이 무뎌져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모한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한다. 며칠 전 우리 딸들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었던 일도 그런 범주에 속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여느 평범한 날들처럼 그날도 우리 딸들은 도서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버튼 누름과 거의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벌컥 열렸다. 조금 움찔해 앞을 보니 중국집 배달원쯤 돼보이는 사람이 바쁜 몸짓으로 내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앞집에서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켜먹었는지 빈 그릇이 한쪽에 놓여 있었고, 배달원은 빛의 속도로 그걸 철가방에 챙겨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채 닫히기도 전인 불과 몇 초 사이에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상황이었다.
중국집 배달원은 빈 그릇을 챙김과 동시에 익숙한 몸놀림으로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낯선 남자와 엘리베이터 함께 타는 걸 매우 싫어하는 우리 딸들은 어쩔 수 없이 짧은 동행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 중국집 배달원이 자꾸 자신들을 힐낏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고 한다. 20대 꽃다운 나이인데다 아빠 눈엔 아주 매우 많이 예쁜 딸들이긴 해도 도서관에 가느라 전혀 꾸미지 않은 민낯인데 왜 자꾸 쳐다보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 하고 싶진 않아서 저희끼리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듯 헐리웃 액션을 펼치며 애써 외면했다. 그래봐야 1층까지 불과 몇 초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직접 몸에 와닿진 않았지만 중국집 배달원은 팔을 휘둘러 자신과 가까이 있던 둘째딸 어깨를 툭 치는 시늉을 하며 자신에게로 주의를 끌어당겼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혹시 그 헬맷 안에서 너네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 얼굴이 나온 거 아냐?" 하고 물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 같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20대 젊은 여자를 시늉으로나마 건드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얼마나 위험하고 오해를 자초할 수 있는 짓인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문제가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정답을 맞췄다는 듯 의기양양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딸들은 "땡! 틀렸습니다" 하고 깔깔댔다. 틈만 나면 잘난 척하기 일쑤인 아빠가 답을 틀린 게 무척이나 재미있고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나이가 40~50은 돼보이는 아저씨였거든욧!" 하고 정답 근처에도 못 갔다며 아빠를 놀려댔다. '아, 그럼 성희롱범인 건가? 중국집 배달원이면 자기네 중국집 도착하기도 전에 체포될 텐데 설마…" 하는 생각이 내 머릿 속을 맴돌았지만, 이번엔 입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두 번씩이나 연속으로 틀렸다간 딸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게될 지 두려워서였다.
그런 아빠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들은 신바람을 내며 얘기를 이어갔다. "갑자기 낯선 아저씨 손이 다가오니까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싶어 순간 얼음이 돼있었거든요. '엘리베이터 안이라 도망갈 곳도 없으니 이걸 팔을 잡아 이빨로 물어 뜯어야 하나, 발로 거시기를 걷어차 버려야 하나'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요. 그랬는데 글쎄 이 아저씨가 중간에 팔을 멈추고 정색을 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누구 찍을 거에요?' 하고 묻는 거에요. 내 참 기가 막혀서 ㅋㅋ"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나는 "별 미친놈이 다 있네. 아니 그게 생판 본 적도 없는 젊은 여자들에게, 그것도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이 꽤나 처드신 아저씨가 할 소리야?" 하고 분개했다. 그나마 성희롱범이 아닌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우리 딸들이 웬 미친놈인가 싶어 불안에 떨었을 걸 생각하면 당장 경찰에 전화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딸 둘이 함께 타고 있던 중이어서 망정이지, 한 명만 타고 있다가 그런 상황을 마주쳤더라면 얼마나 더 겁을 먹고 당황했을까 싶어 화가 났다.
그 당황스럽고 당혹스럽던 순간 큰딸은 순간적으로 "저는 아직 미성년자라 투표권이 없어요"라고 대답할까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건 아니다 싶어 "스물 다섯 살이나 먹은 놈이 그건 너무 양심이 없는 거지. 그리고 우리 딸은 콩깎지 낀 아빠 눈으로 봐도 여섯 살이나 깎아줄만큼 동안은 아냐!" 하고 말해 큰딸의 곱지 않은 시선을 자초했다. 둘째딸은 "아직 못 정했어요"하고 내키지 않는 티를 팍팍 내며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문제의 아저씨가 어떤 답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판에 누굴 지지하니, 누군 지지하면 안 되니 하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중국집 배달원 아저씨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게 화난다는 듯 찬바람을 씽 날리며 오토바이로 달려갔다.
얘기를 다 듣고난 나는 화나는 건 일단 차치한 채 중국집 배달원 아저씨가 듣고 싶은 답은 과연 뭐였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우리 딸들이 그를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헤어질 때까지의 일련의 상황을 되짚어봤다. 그 결과 <이대남>이니 <이대녀>니 하는 요즘 선거 국면에서 부쩍 주목을 받고 있는 시대적 용어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유신독재와 5공화국 군사독재 등 혹독한 정치상황을 직접 마주했을 40~50대 아저씨라면 아마 요즘 선거판 분위기가 많이 불만스럽고 불안했을 테고, 그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는 <이대남>과 <이대녀>를 단 한 명이라도 설득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도가 아무리 좋고 딴엔 대의명분이 있는 거라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함부로 행동하는 건 민주주의 국가에선 엄연한 반칙인 거다. 다른 누군가에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누굴 지지한다 말할 순 있겠지만, 내가 좀 더 나이가 많고 똑똑하니까 내 말만 듣고 무조건 누굴 찍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한결같이 선거 4대원칙이란 지침 아래 평등선거, 비밀선거 등을 보장한 이유가 바로 그거다. 권력이나 재산이 많건 적건, 나이가 많건 적건, 박학다식하고 지능지수가 200이 넘건 그 반대건 투표권은 무조건 국민 1인당 1표씩 평등하게 부여하고, 국가권력이 됐건 친혈육이 됐건 그 누구의 간섭도 배제한 채 오로지 본인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투표를 할 수 있도록 비밀선거를 보장한 것도 그래서다.
나이를 좀 더 먹었고 세상 경험이 조금 많다고 해서 내 의견만 옳다 생각하는 건 독선이거나 자기 세대 중심의 이기주의다. 40~50대에게 옳은 게 이대남이나 이대녀에게도 옳은 걸 수는 없다. 40~50대에게 가장 가치있는 게 이대남 이대녀에게도 가장 가치있는 건 아닐 수 있고, 40~50대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이대남 이대녀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로 다를 수 있다.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거고, 그런 다양성을 인정해야만 민주주의란 나무는 굳게 뿌리내린 채 올곧게 성장할 수 있는 거다.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통 글러먹었어" 같은 <꼰댓소리>가 예전엔 잘 먹혔을지 몰라도 이젠 절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영화 <워낭소리>는 진한 감동으로 세대를 넘나들며 큰 울림을 전해줬지만, 현실 속 <꼰댓소리>는 지독한 꼰대냄새로 세대를 갈라치며 역한 속 울렁임만을 부추길 뿐인 시대다. <꼰댓소리>가 가깝게는 우리집 안방을 넘지 않도록, 멀게는 남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까지 침범해 누군가의 멀미를 유발하는 일이 없도록 삼가하고 또 삼가할 일이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