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 도중 작은딸이 뭔가 재밌는 일이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대충 짐작은 갔지만, 모처럼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생겼다는 듯 신바람을 내는 작은딸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나는 "아니, 들어본 적 없는데? 진짜 돼지가 문신을 한 건 아닐 거구 그게 뭔데?"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작은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구멍까지 벌름거려 가며 "문신돼지가 뭔가 하면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다니는 애들 중에 좀 뚱뚱한 애들을 얘기하는 건데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엊그제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 길에 대학가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그 말로만 듣던 <문신돼지>를 자그마치 여덟 마리나 봤다는 거였다. 요즘 세상에 문신 좀 한 게 흉도 아닐뿐더러 뚱뚱하다고 해서 사람한테 돼지란 표현을 쓰는 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일단 무슨 얘기인지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 아빠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은딸은 모처럼 접한 흥미로운 사건 얘기를 전하느라 자못 신바람을 냈다. 문신돼지 여덟을 한 자리에서 마주친 건 아무래도 작은딸 입장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큰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느라 친구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다 보니 문신돼지는 고사하고 일반 사람도 여덟 명씩이나 한 자리에 모이는 건 보기 쉽지 않은 날들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단순히 문신돼지 여덟이 모인 거였으면 작은딸이 그렇게까지 흥분하고 입에 침을 튀기진 않았을 거였다. 얘기를 마저 들어보니 중요한 건 문신돼지 여덟이 한 자리에 모인 'who'가 아니라 그렇게 모여서 '무엇을(what), 어떻게(how)' 했느냐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의 문신돼지 여덟은 친목 도모를 위해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러 작은딸 일행이 어울려 놀던 문제의 술집을 찾은 건 아니었다.
술집에 들어올 때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마치 시위라도 하듯 단체로 우르르 몰려들어 온 거까진 그들의 행동습성이라 이해할 수도 있었다. 굳이 그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중엔 제 힘만 믿고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걷는 이들이 하나둘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몰려들어 와선 하필이면 여자 손님들이 많은 쪽 자리를 일부러 골라앉은 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한 테이블씩 돌아가며 억지로 시비를 걸기 시작한 건 누가 봐도 다분히 의도적이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여자 손님 넷이 마주 앉아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꺄르륵 꺅꺅 신나게 놀고 있는 테이블을 향해선 "씨*, 이 술집 너네가 전세냈냐? 아가리들 안 닥쳐?" 하고 으르렁거리는가 하면, 예쁘장한 여자 손님 셋이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는 다른 테이블을 향해선 "우리 데이트나 한 번 할까? 왜, 싫어? 우리가 너네 잡아먹을까 봐 그래? 이런 씨*, 우릴 뭘로 보구" 하며 금방이라도 쫓아가 어떻게 해버릴 것처럼 겁을 주는 식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친구들과 함께 기분 좋게 술을 마시러 왔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한 여자 손님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채 하나둘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며 술집을 빠져나갔다. 작은딸 일행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문신돼지 일행이 시비를 걸어오기 전에 서둘러 술자리를 마쳤다. 남은 안주가 아까워 술집 사장이나 종업원이 어떻게 해주길 내심 기대하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여자 알바생을 향해 그들이 "씨*, 같은 손님인데 차별하냐? 왜 슬금슬금 피해 다녀?" 하고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시비를 거는 걸 보는 순간 기대를 접었다.
작은딸은 "나 같으면 경찰에 신고했을텐데, 그 술집 사장은 왜 신고도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아쉬워했다. 신고했으면 분명 경찰 아저씨들이 출동해 영업방해죄 같은 걸로 그들을 잡아갔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얘기를 듣는 중간부터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문신돼지>라 불린 그들은 분명 일반 손님이 아니었을 거고, 그런 식으로 손님들을 위협해 내쫓은 수작 역시 한두 번 벌인 짓은 아닐 거란 판단이 들었다.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십중팔구 이른바 '보호비'라는 걸 받아내기 위해 동네 건달들이 벌인 수작이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보호비 내기를 거부하는 가게들에 일반 손님처럼 찾아가 위협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험한 분위기를 조성해 멀쩡한 손님들을 내쫓음으로써 장사를 방해하는 수작이 매우 낯익어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해당 가게는 단골손님들이 끊기게 되고, 술집 분위기가 안 좋다는 소문까지 더해져 결국 문을 닫거나 울며 겨자먹기로 보호비를 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은딸의 바람처럼 이 과정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가게 사장도 분명 있을 거였다. 하지만 <문신돼지>들의 행동이란 게 언뜻 보기엔 아무렇게나 막 하는 거 같아도 나름 다져진 노하우가 있는지라 법에 저촉될 만한 짓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막상 경찰이 출동해봐야 직접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범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은 없다 보니 처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찌어찌 범법행위 증거를 찾아 그들을 재판에 넘긴다고 해봐야 다른 패거리들이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갈 테니 <문신돼지> 얼굴만 바뀔뿐 악순환은 계속되게 마련이다.
법은 정의로운 자나 착한 자의 편이 아니라 법을 잘 알고 이용해먹는 나쁜놈들 편이라는 말을 듣고 공감한 적이 있다. 나처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에겐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그 말이 정말 공감될 때가 많이 있다. 법을 잘 지키며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편하게 잘 사는 꼴을 많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떠르르한 분들은 물론이요, 변호사와 사돈의 팔촌쯤 친분이라도 있는 사람들 역시 법꾸라지 짓을 일삼으며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비단 요 근래, 대한민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몇 백 년 전 지구 반대편 프랑스란 나라에 살았던 파스칼이란 양반도 그걸 뼈저리게 느꼈었던 모양이다. 그가 쓴 <팡세>란 책을 보면 '정의는 말썽이 되기 쉽고, 힘은 아주 쉽사리 받아들여져 말썽이 없다. 그래서 정의에 힘을 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힘이 정의에 대들어 정의는 옳지 않고 제가 옳다고 우겨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옳은 자를 강하게 할 수가 없어 강한 자를 옳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하고 정의없는 힘은 포악하다'고 같은 단원에서 그는 말했다. 정의가 힘이 없으면 힘센 자들의 저항에 밀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능해지는 거고, 정의없는 힘이 포악할 수밖에 없는 건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힘으로 밀어붙여서라도 기어이 강행하려 들기 때문이다. 우리 작은딸이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정의 없는 힘이 세상 구석구석을 좀먹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선 비록 힘 없는 정의나마 서로 힘을 합치고 서로에게 힘이 돼주어야만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