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소잡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사진장이 Apr 13. 2022

슬기로운 익명게시판 생활

소소잡썰(小笑雜說)

어떤 사람이 인터넷 사이트 익명게시판에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워 먹고 살기도 힘든데 큰 수술까지 받게 돼 절망스럽다. 죄송하지만 누군가 좀 도와주셨으면 한다"고 글을 올렸다. 측은지심이 동한 A라는 사람이 도와주고 싶어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말 한 마디에 무턱대고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도움을 청한 사람은 A의 요청에 따라 본인 이름과 주민번호, 사는 집 주소, 생활보호대상자 증명 등을 잇따라 제시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보이스피싱 사기를 연상케 하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됐다. 이에 A는 "시진핑 개○○ 한 번만 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묵묵부답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극악한 중국인 범죄자라 할지라도 감히 시진핑 주석을 상대로 욕은 못 한다는 인터넷 속설을 반영한 대응이었다. 이 얘기의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공안 앞에선 설설 기는 중국인들 속성을 생각하면 한번쯤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재미도 있거니와 나름 유익한 정보라 판단돼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딸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딸들은 재밌다며 깔깔거리는 한편 자기들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우리 딸들 또래 대학생들이 개인정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이런저런 글들을 올리는 익명 커뮤니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그것이었다.


딸들이 들려준 첫 번째 에피소드는 내가 했던 얘기와 맥락이 닿아있는 중국인 관련 얘기였다. 하루는 익명으로 누군가 "요즘 학교 공부하기가 정말 힘들어요"라고 하소연성 글을 올렸는데, 다른 누군가가 대뜸 "너 중국지?" 하고 댓글을 달더라는 거다. 또래 친구들이 공감해주기를 바라며 하소연성 글을 올렸을 게시글 작성자는 "네? 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중국이라고 욕하는 거에요?" 하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자 댓글 작성자는 "한국의 대학생들은 절대로 '공부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따위로 얘기하지 않아. '아 씨, 공부하기 졸라 힘들어'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다른 여러 학생들이 "맞아 맞아" 하고 동조하고 나섰다. <버스카드충전소>를 <뻐카충>으로 줄여쓰듯이 한국의 대학생들에겐 외국인들이 쉽게 따라하기 힘든 자기들만의 언어 습관이랄까 문화 같은 게 있었던 거다.


이 얘기를 들은 뒤 "그러면 아빠 같은 스타일로 글 쓰는 사람은 그 익명 커뮤니티에선 바로 중국으로 몰리겠네?" 하고 내가 묻자 딸들은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ㅋㅋ"라 답했다. 그러면서 문제의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에서 있었던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를 잇따라 들려줬다.


한 번은 누군가가 "엑셀에서 이러저러한 반복작업들을 매크로를 이용해 처리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라고 올렸다. 그랬더니 다른 누군가가 댓글에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그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요렇게 하심 됩니다"라고 올렸다. 게시글 올린 사람이 깜짝 놀랐다는 듯 "교수라고 밝히지도 않았는데 제가 교수인 건 어떻게 아셨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댓글 단 사람 하는 말이 "말투가 딱 교수님 느낌이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글을 올리면 아마 중국이 아니라 교수님쯤 된다 생각할 거에요 ㅋㅋ" 하며 딸들은 재미있어 했다.


이어 딸들은 또 다른 얘기를 들려줬는데, 이 세 번째 에피소드가 개인적으로 나는 가장 재밌었다.


하루는 누군가가 커뮤니티에 "아 씨, 답안지에 글씨 졸라 휘갈겨 썼다고 D 받았는데, 이게 말이 되냐?"라고 비분강개해 글을 올렸다. 딴엔 D 받은 게 억울하기도 하고, 또래의 다른 친구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는 어조였다. 그런데 글쓴이가 기대했던 거와는 달리 댓글들은 성토 일변도였다. "졸라 휘갈겨썼음 나 같아도  D 줬겠다", "교수님의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 등등 글쓴이를 성토하는 글들이 잇따랐다.


그렇게 분위기가 성토 일변도로 치닫자 글쓴이는 "아, 정말 고민됐었는데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니 부담감 없이 D줘도 되겠네요. 소중한 의견들 감사해요" 하고 답글을 달았다. 그 순간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뒤늦게 글쓴이의 정체가 D학점 받은 학생이 아닌 D를 줄까 말까 고민 중인 교수님인 걸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보는 기준에 따라선 문제의 답안지에 '글씨를 졸라 휘갈겨 쓴' 학생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단 걸 뒤늦게 깨닫고는 앗 뜨거라 싶었던 거다.


이에 학생들은 백팔십도 태도를 돌변해 "교수님, 글씨를 좀 못 썼다고 D를 주시는 건 과도한 처사라 사료되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옵소서", "그 학생이 일부러 휘갈겨 쓰려고 한 게 아니라 원래 악필이라 그랬을 겁니다. 아무쪼록 너른 아량으로 정상참작 부탁드립니다" 등 옹호성 글들을 잇따라 올렸다. 하지만 이미 교수는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은 뒤 게시판에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이 얘기들을 접하며 나는 익명의 공간이라고 해서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무도 모를 거라는 착각 아래 뇌를 거치지 않고 배설하 듯 내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결국은 돌고돌아 내 뒷통수를 후려 팰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익명게시판이란 건 민낯으론 차마 털어놓기 힘든 얘기들을 다른 누군가와 좀 더 편하게 나누면서 다양한 의견들을 구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지, 지하벙커에 자신을 꽁꽁 숨긴 채 불특정다수를 향해 기관총 난사 혹은 수류탄 투척 류의 언어 테러를 일삼으라고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가 갑자기 코를 곤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