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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Apr 06. 2022

아내가 갑자기 코를 곤 이유

소소잡썰(小笑雜說)

아내는 평소 코를 골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코를 고는 습관이 있다. 지난 밤이 바로 그러했다. 전날 저녁 내가 잠들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밤 사이 도대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출근하느라 바빠 미처 물어볼 틈이 없었는데, 그 의문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풀렸다. 수다스런 딸들 입을 통해서다. "아빠 아빠,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로 시작된 작은딸 수다를 들어보니 아내를 포함한 세 모녀는 밤 사이 <신밧드의 모험>을 방불케 하는 대모험을 펼쳤던 모양이다.  


사건의 발단은 큰딸로부터 시작됐다. 곧 있을 시험 준비를 하느라 동네 독서실에서 밤 12시 넘어까지 열심히 공부를 한 뒤 집에 돌아온 큰딸이 갑자기 "내 반지가 없어졌어!!!" 하며 비명을 내지른 게 그 발단이었다. "독서실에서 나오기 전까진 분명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라며 큰딸은 제 방과 동생 방, 화장실 등을 이 잡듯 뒤지며 한바탕 난리를 쳤다. 


샤워를 하고 나오느라 뒤늦게 이 같은 상황을 알게 된 작은딸은 덩달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제 언니가 평소 문제의 반지를 부적처럼 여기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시험을 목전에 두고 있는 터라 작은딸은 자연 제 일처럼 마음이 바빠졌다. 집안을 이 잡듯 뒤진 끝에 큰딸이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음에도 작은딸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에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감싼 채 다짜고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 안은 언니가 이미 뒤질만큼 다 뒤졌으니 분명 독서실서 집에 오는 길목 어딘가 떨어뜨렸을 거라 판단한 거다. 독서실서 나오기 전까진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고 하니 분명 독서실과 집 중간 어딘가에 반지가 떨어져 있을 거라 생각했고, 누가 주워가기 전에 얼른 찾아야겠단 생각을 한 듯하다. 이때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핸드폰 플래시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다짜고짜 밖으로 뛰쳐나간 작은딸은 잠시 고민했다. 만일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 길바닥 어딘가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찾아야 할까 싶어서다. 그 결과 핸드폰 플래시로 비췄을 때 그 반지가 어떤 모습으로 눈에 비춰질 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엄마가 커플링처럼 맞춰 선물해 준 큰딸 거와 똑같은 제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 인도 위, 아스팔트 위, 풀섶 등에 떨어뜨린 뒤 핸드폰 플래시로 비춰보았다. 이런 경우엔 이렇게, 저런 경우엔 저렇게 보이는구나 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해본 거다.


그리고는 집에서 독서실까지의 길 여기저기를 핸드폰 플래시로 열심히 비춰가며 시뮬레이션 때처럼 뭔가 금속성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기를 열심히 고대했다. 하지만 집에서 백미터 남짓 떨어진 독서실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도 문제의 반지는 끝내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독서실 입구 키오스크나 계단에 떨어뜨렸나 싶어 그 주변까지 샅샅이 찾아봤지만 반지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독서실 건물 바깥 쪽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불빛 하나가 갑자기 훅 쳐들어 왔다고 한다. 새벽 1시 넘은 시간이라 거리에 인적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독서실도 문 닫을 시간이어서 올 사람도 없으니 작은딸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혹시 이상한 놈이 자기 뒤를 쫓아온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의 불빛 주인공은 제 엄마였다. 평소 잠귀가 예민한 편인 아내는 반지를 찾느라 소동 피우는 딸들 기척에 작은딸이 집밖으로 뛰쳐나갈 때쯤 잠을 깼고, 큰딸에게 물어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듣고서는 작은딸이 걱정돼 찾아나선 거였다.


그 딸에 그 엄마라고 했던가? 반지를 땅에 떨군 뒤 플래시 불빛에 비춰본 작은딸도 범상치 않았지만, 아내는 한술 더 떴다. 작은딸로부터 그동안의 반지 찾기 과정을 전해듣더니만 "떨어진 반지는 튕기게 돼있어. 그니까 어떻게 튕겨서 어디로 갔는지 찾아봐야 해"라며 작은딸 반지를 건네받아 인도와 아스팔트, 풀섶 등에서 한 번씩 떨어뜨려가며 시뮬레이션을 해본 거다. 떨어뜨리는 거리와 각도, 길 위 평평함 정도나 바닥 재질 등 수많은 변수에 따라 결과값은 다 제 각각일 거여서 사실 그리 과학적인 수사방법은 아니었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나름 과학적인 시도였다.


그렇게 젖은 머리 위에 대충 수건을 뒤집어 쓴 20대 딸과 자다 말고 막 뛰쳐나온 50대 엄마 두 모녀는 열심히 열심히 KCSI를 방불케 하는 과학수사를 펼쳤다. 하지만 잃어버린 반지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끝내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고, 두 모녀는 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 선언을 당한 운동선수들처럼 힘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었던 아내가 갑작스레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에 지쳐 코를 골게 된 이유가 여기 있었다.  


한밤의 대소동을 야기했던 큰딸 반지는 다음날 아침 정말 엉뚱한 곳에서 발견됐다. 부엌 씽크대 고무장갑 안이 바로 그곳이었다. 추정컨대 전날 저녁 설거지 당번이었던 큰딸은 고무장갑을 낀 채 열심히 설거지를 했을 거고,  설거지를 모두 마친 홀가분함에 서둘러 손을 빼는 과정에서 제 손의 반지가 빠지는 것도 못 느낀 모양이었다. 손에 꽉 끼는 것을 싫어하는 큰딸 성격 탓에 반지 링 사이즈를 부러 좀 느슨하게 맞춘 영향도 있었다.


그걸 발견한 아내는 간밤의 대소동을 떠올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행하고 감사하게도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소중한 반지는 되찾았지만, "독서실서 나오기 전까진 분명 손가락에 있었는데…"라는 말 한 마디를 잘못 내뱉음으로써 제 엄마와 동생을 새벽 1시 넘은 시간에 길거리로 내몬 죄 때문에 큰딸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뻔 했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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