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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Apr 20. 2022

"기사님도 저같은 딸이 있지 않으세요?"

소소잡썰(小笑雜說)

스물몇 살이나 먹은 다 큰 딸들에게 뭔 꼰대짓이냐 욕먹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집 쌍둥이 딸들에겐 아직까지도 통금시간이 존재한다. 제 아빠를 닮아 술 좋아하고 술자리를 좋아하다 보니 그동안 몇 차례 술에 만취해 사고 아닌 사고를 쳐온 전과가 있었고, 그때마다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지는 소동이 일다 보니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였다. 사고를 치더라도 엄마 아빠 도움없이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때까지, 혹은 독립해 나갈 때까지라는 단서조항을 붙여서였다.


그 통금시간 때문에 우리집에선 간헐적으로 한 번씩 사건사고가 벌어지곤 한다. 앞서 글을 올린 바 있는 <88여관 사건. 아래 링크 참조>도 그 대표적인 사건사고 중 하나였는데, 며칠 전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역시 범인은 작은딸에 비해 전과가 화려한 큰딸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마실 때면 그야말로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통금시간 12시까지 알뜰히 꽉 채워 음주가무를 즐기는 성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https://brunch.co.kr/@bakilhong66uhji/92



이날도 큰딸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학가를 무대 삼아 밤 11시50분까지 꽉 채워 친구들과 신나게 음주가무를 즐겼다. 그리고는 통금시간 10분여를 남겨둔 채 부랴부랴 택시를 잡으러 달려나갔다. 문제는 이 밤 12시라는 시간이 이때까지만 해도 코로나19 사태로 영업시간 제한을 받고 있던 음식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는 거고, 하필 이날은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택시 수요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는 거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큰딸은 필사적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정말 어렵사리 빈 택시 한 대를 잡았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시 외곽 쪽에 위치한 우리 동네 이름을 듣는 순간 "이 시간에 그쪽으론 못 갑니다" 하고 매몰차게 승차 거부를 해버렸다. 길거리 택시 잡기에 실패한 큰딸은 카카오택시를 몇 번이나 호출해봤지만, 평소와 달리 콜에 응하는 택시가 없었다. 술자리를 함께 했던 다른 친구들의 경우 집 방향이 유흥가가 즐비한 시내 쪽이라 그런지 일찌감치 빈 택시를 잡아타고 떠난 것과는 완전 대조적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시간대가 시간대인 만큼 손님을 태우고 가 내려준 뒤 곧바로 다음 손님을 태우기 좋은 방향을 골라 선별적으로 태운 듯 싶었다.


12시가 넘도록 택시를 잡지 못한 큰딸은 일단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통금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가려 했지만, 택시가 안 잡혀 부득이하게 늦는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따라 엄마 아빠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든 뒤였고, 우여곡절 끝에 연락을 받은 건 동생인 작은딸이었다. 앞서 작은딸이 밤 늦게까지 시내에서 놀다가 택시가 안 잡혀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을 때 마침 깨어있던 아빠가 차를 몰고 나가 태우고 돌아왔던 거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모양인데, 큰딸로선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밤 늦게까지 집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막 귀가한 작은딸은 언니 전화를 받고 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기 역시 택시가 너무 안 잡혀 걸어서라도 집에 돌아가야겠단 일념으로 밤거리를 걸어보긴 했지만, 젊은 여자 혼자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걸어가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라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심정으로 제 방에서 카카오택시를 호출해 봤는데, 호출하기가 무섭게 바로 택시가 잡혔다. 그 시간대 시내 방향에서 우리집 쪽으로 오는 건 택시들이 기피했지만, 우리집에서 시내 쪽으로 가는 건 매우 반겨한다는 증거였다.


언니를 구해 돌아오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작은딸은 다짜고짜 택시를 타러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언니가 있는 대학가 쪽으로 가달라고 택시 기사에게 얘기했다. 이어 조심스레 "근데요 기사님, 저희 언니가 그쪽서 택시를 못 잡아 제가 데리러 나가는 건데, 거기서 저희 언니 픽업해 집으로 다시 와주셨음 하는데요..." 하고 부탁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정색을 하며 "그건 안 됩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예기치 못한 단호한 거절에 작은딸은 애가 탔다. 언니를 픽업해 다시 집으로 올 수 없다면 이렇게 택시를 잡아타고 나가는 게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택시기사를 설득해야겠단 생각을 했고, 택시 왕복요금의  2배로 요금을 지불하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무슨 똥고집인지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만 했다. 작은딸이 마침내는 "기사님도 저 같은 딸이 있지 않으세요?" 하는 부성애 호소 전략까지 동원한 것도 그래서였다.


뭘 알고 들이댄 건 아니었겠지만, 작은딸의 이 같은 부성애 호소 전략은 주효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택시기사는 선선히 자신에게도 딸이 있음을 시인했고, 작은딸이 "아저씨 딸이 이 시간에 택시를 잡지 못해 밤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빠로서 걱정이 되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호소하자 순순히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리고는 처음의 단호했던 거절 태도를 백팔십도 뒤집어 큰딸을 픽업한 뒤 다시 우리집까지 태워다 주는 데 동의했다. 뿐만 아니라 택시비도 2배가 아닌 정상적인 요금만 받겠다고 고집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오래전 서울에 살던 시절 택시 잡기 경험을 떠올렸다. 가는 방향과 거리까지 따져가며 걸핏하면 승차 거부를 일삼고, 일행 3~4명이 같이 택시를 타려 들면 합승을 못 한단 이유로 못 타게 하기 일쑤였으며, 혼자 타고 가다 보면 승객 의사 따윈 묻는 법도 없이 한 명이고 두 명이고 합승 승객을 태워 얼마간 돌아가는 길도 서슴지 않던 그 옛날 택시기사들의 깡패 행태가 생각났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나 지방도시에서나 택시 한 번 타기가 정말 이렇게나 힘들어서야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요즘은 일명 '지지기'라 불리우는 불법 매크로 앱까지 성행해 혼잡시간대 택시 잡기가 더 한층 어려워졌다고 한다. 스마트폰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을 때 짧은 거리를 이동하거나 택시기사들 비선호지역으로 가려 하는 콜이 뜨면 패스해 버린 뒤 돈 되는 콜만 골라 잡아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한 거다. 그래서 눈앞에 빈 택시가 줄을 지어 서있어도 스마트폰 앱을 통해 호출을 하면 택시를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입비에 월 사용료까지 지불해야 사용할 수 있는 이 불법 매크로 앱 이용 여부에 따라 한 달 수입이 100만 원 이상 차이 나기도 한다니 택시기사들 입장에선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너무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싶어 안타깝고 화가 난다. 한때 택시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대리운전 산업이 급속히 발전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제 불과 몇 년 후면 현실로 다가올 자율주행차 시대가 되면 사람들이 그런 택시들 꼴보기 싫어서라도 돈 좀 더 보태 자율주행차를 사려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몇 푼에 취해 온갖 꼼수와 불법을 일삼는 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이고,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동업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걸 택시기사들이 제발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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