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사진장이 Aug 23. 2021

딸아, 밤 11시에 여관 결제문자는 쫌...

소소잡썰(小笑雜說)


몇 년 전 큰딸이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일입니다. 그 맘 때 애들이 다 그렇다곤 합디다만, 입학과 함께 큰딸은 대학 1학년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대학 1학년병이 뭐냐구요? 아는 분들은 이미 다 알겠지만, 각종 모임에 나가 걸핏하면 꽐라가 돼 들어오는 대학 새내기 증후군을 말합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험생 생활하느라 스트레스 받다가 대학생이 되면 흔히들 걸리는 병이죠.


뭐 적당한 음주야 생활의 활력이 되고,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게 만드는 촉매제가 된다는 거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나 역시 음주가무를 즐기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십분 이해합니다. 딸 역시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진출했으니 처음 만나는 선배며 동기들과 이런저런 모임이 많을테고, 모임을 하다 보면 술도 한 잔씩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문제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면서 제 스스로 감당이 안 될만큼 술을 너무 과도하게 마신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엄마 아빠와 약속한 통금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아빠, 통금시간 조금만 연장하면 안 될까요?"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화장실 바닥에다가 자기가 그날 먹은 안주가 뭔지를 일일이 다 확인하곤 하죠.


내 속으로 낳아 똥 오줌 다 가려가며 기른 딸이긴 하지만, 그 처참한 현장을 볼 때면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와 정말 죽을 맛입니다. 제 딴엔 청소를 한다고 하는데, 나중에 청소를 하다보면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잔여물 건더기가 하나 둘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딸이 무슨 모임이 있다며 나갈 때면 "오늘 또 꽐라가 돼 들어오면 너 죽고 나 사는 거다" 하며 협박을 하곤 하지만, 소 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더군요.


그러던 어느날입니다. 그날도 어째 느낌이 쌔 하더니만 모임이 있다며 나간 딸로부터 통금시간이 임박해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빠, 나 오늘 좀만 늦게 가면 안돼요?" 하는 내용이었죠. 화가 난 아내와 나는 "또 꽐라가 돼 들어올 거면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마" 하고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날렸습니다.


그로부터 한 5분이나 지났을까요? 아내의 휴대폰으로 또 다시 문자 한 통이 날아 왔습니다. 딸이 한번 더 통금시간을 좀 늦춰달라고 부탁하나 보다 생각하며 문자를 열어봤는데, 아내와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습니다. '88여관, 35,000원 체크카드 결제'라고 딸의 카드 결제내역이 떴기 때문이죠. '왓? 88여관? 35,000원? 지금이 밤 10시50분인데? 그럼 이눔의 시키가?…'.(참고로 큰딸이 미성년자일 때 체크카드를 만들어주다 보니 결제문자 메시지 수신처가 아내 휴대폰으로 돼있습니다)


짧은 순간 참 별의별 생각들이 다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놀람과 분노, 배신감, 당황 등등 정말 머리가 복잡했죠. '10시50분에 여관에 갔단 얘기는 집에 안 들어오겠단 얘기인가', '술에 취해서 혼자 여관에 간 건가? 아님 어떤 시키와 같이?', '전화를 해서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당장 집으로 오라고 해야 하나?'


짧은 순간 머리가 터져라 고민을 하고 있는 찰나, 아내가 옆에서 끼어 들었습니다. "우리 딸 모임한다던 동네가 효자동 맞아?" 하면서요. 여관이라는 말을 듣고 아마 아내도 깜짝 놀라서는 당장이라도 쫓아갈 생각으로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떨결에 내가 "맞는 거 같아"라고 답하자 아내는 "이런 십장생 같으니라구. 무슨 이름을 그따구로 지어서는..." 하며 자기 스마트폰을 내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보니 거기엔 88여관이라는 이름과 함께 웬 주점 사진이 턱하니 나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88여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여관이 아니라 젊은애들이 즐겨가는 술집이었던 겁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딸아이는 얼큰하게 취하신 얼굴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제 엄마 아빠가 여관이라는 단어 하나에 혼비백산해 그 난리를 친 건 상상도 못하는 아주 태평한 얼굴로요. 아마도 내가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날린 걸 보고 부랴부랴 술값을 계산한 뒤 집으로 달려온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딸에게 아내와 나는 여관이라는 단어 때문에 온갖 불칙한 상상을 했던 속내는 차마 내색도 못한 채 형식적으로 몇 마디 혼만 내고 말았습니다. 이미 성인이 된 딸을 두고 너무 오버질을 한 거 아닌가 염려되기도 했지만,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1년생이다 보니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모양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의 평화를 열렬히 소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엄마 아빠들을  대신해 꼭 하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가게 이름으로 기억하기 좋으라고 튀는 이름을 짓는 건 좋지만, 술집 이름에 여관이 들어가는 건 쫌 지나친 반칙 아닌가요? 무심코 본 자녀 혹은 남편과 아내 카드사용 문자 메시지에 '00여관 35,000원 결제' 이런게 뜨게 만드는 건 짧은 순간이나마 한 가정의 평화와 신뢰를 깨뜨릴 수 있는 심각한 엘로카드감이라고 이 연사 힘차게, 힘차게 외쳐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5G시대는 우리 아버지들에게 너무 숨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