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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May 02. 2022

어머니 제사를 안 모시겠다는 큰형의 분노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83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머니 제사를 안 모시겠다는 큰형’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인즉 동생들 중 아무도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지 않으려 들자 화가 난 큰형이 요즘 말로 치면 ‘독박 부양’을 하겠다고 나선 전후 이야기다.


택시운전 기사였던 큰형은 자기가 어머니를 모시겠다면서 “대신 나중에 제사는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시는 동안 잘 모시는게 중요하지 돌아가신 뒤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림 뭐하냐는 주장이었다.

어머니 역시 “네 말이 맞다”며 큰형 의견에 동의하셨다.


큰형은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지극정성으로 봉양을 했다.

어머니가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하면 일하다 말고도 열일 제쳐놓고 즉시 사다 드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러자 동생들은 “그래도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는 지내야 되지 않겠냐?”고 큰형에게 말했다.

이에 큰형은 “생전엔 어머니를 외면했던 것들이 어디서 감히 제사 운운이냐”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면서 “제수씨들 중 제사 도맡아 지낼 사람이 있으면 지내시라”고 쏘아붙였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렸다.

돌아가시기 전 병들어 누우셨을 때부터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배가 아프다며 혼자 끙끙 앓으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이 병원 저 병원 검사를 받으러 다니던 나날들, 그러다가 투병 막바지엔 2~3일이 멀다고 위독하시단 전화가 걸려와 일하다 말고 전주에서 서울 병원까지 오가기를 몇번이었던가...


그렇게 연로하신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임종까지 힘겹게 지켜 드렸건만, 10~20년 간 연락도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가족이랍시고, 혹은 친척이랍시고 장례식장에 뒤늦게 나타나서는 관은 뭘 쓰고 수의는 어떤 걸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아버지가 아플 땐 아는 척도 않던 사람들이 그 주검 앞에선 주제 넘게 상주 노릇, 어른 노릇을 하려 들었다.

'어머니 제사를 안 모시겠다는 큰형'이 동생들에게 느꼈을 분노가 바로 이런 거였겠구나 싶었다..


따지고 보면 장례식도, 제사상도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난 생각한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건 그런 허례허식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싸구려 삼베 조각으로 수의를 하고 제삿상에 사과 반쪽, 식은 밥 한 덩이를 올릴지라도 정성이 깃들면 되는 거다.

없는 살림에 허례허식으로 무리하게 수의를 하고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음식을 차리는 것보다는 진심 어린 슬픔,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당신들을 기억해주고 그리워해 주는 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을 위하는 길이다.


※사진은 우연히 인연이 닿아 찍게 된 연극 '염쟁이 유씨'의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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