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84
"느그 아부지 오늘은 출근 안하셨나?"
어린 시절, 모처럼 새로 산 옷을 입고 학교에 간 날이면 거의 어김없이 듣게 되는 말이었다.
몸 크기에 비해 옷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형들이 입던 헌옷만 물려입다가 명절이네 뭐네 해 어쩌다 새옷 한벌 얻어입을 기회가 생길 때면
어머니가 앞으로 몇 년은 더 입어야 한다며 두세 치수 큰 놈을 고르다 보니 생긴 희극이었다.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되, 두 되 단위로 이른바 '봉지쌀'을 사다가 근근히 한 끼 두 끼 때우던 시절이었던만큼
옷이라는 건 벌거벗은 몸을 가려주기만 하면 족할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라온 환경 때문에 옷 크기에 대해선 다소 둔감하게 지난 몇십 년을 살아왔다.
그러던 중 최근 작은 문화적 충격을 받은 사건(?)이 생겼다.
청바지 허리가 2인치가 아닌 1인치 단위로 나오고 있다는걸 알게 된 것이다.
몇 년만엔가 청바지를 살 일이 생겨 직접 매장을 방문한 덕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디자인과 사이즈가 맞춤한 걸 골라 계산하려 보니 가격이 16만원이 넘었다.
그래서 일단 하나만 산 뒤 같은 메이커의 비슷한 제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그런데 배달돼 온 청바지를 입어보니 허리 부분이라든가 몸에 붙는 느낌이 영 달랐다.
이에 뭐가 문제일까 제품 라벨을 곰곰히 살펴봤는데, 그 결과 매장서 사온 건 31인치임을 알게 됐다.
10대 때부터 청바지를 즐겨 입어왔지만 31인치라라는 건 경험해 본 적 없는 사이즈였다.
내가 아는 청바지 사이즈는 항상 2인치 간격 짝수 단위로만 이뤄졌었기 때문이다.
약간 큰 정도는 그냥 벨트로 조여 입으면 된다고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 시대 문화 덕분에 웬만한 집엔 재봉틀도 한 대씩 놓여있곤 했었다.
시대가 흐르고 소비 니즈가 점점 까다로워지다 보니 그 1인치 남짓 간극도 용납이 안되는 모양이다.
덕분에 "느그 아버지 오늘은 출근 안하셨나?" 하는 썰렁한 농담도 자취를 감춘 시대가 됐지만,
사람이 옷을 입은 건지 옷이 사람을 입은 건지 헷갈리던 그 시절 그 친구들 모습이 왠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