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출근한다 거짓말하고 산에 간 이유

자식놈일 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 이야기 #21

by 글짓는 사진장이


국난(國難) 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IMF 사태가 터졌던 1998년 무렵,

평일 산엘 가면 양복 입은 아버지들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수 있었다.

IMF 사태로 극심한 경영난에 빠진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한 뒤

차마 식구들에게는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 출근하는척 집을 나선 거였다.


처음 얼마간은 커피숍도 가고 도서관도 가서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 돈 나올 구멍도 없다는 자각에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고

그래서 결국 가장 돈 안들이며 시간을 보낼수 있는 장소로 산을 선택한 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끝내 직장을 구하지 못할 경우 '노가다'라도 해야겠단 생각도 있었을 거다.

펜대 굴리는 일 외엔 딱히 가진 기술도 없는 터라 가장 만만한 게 노가다 같은 몸 쓰는 일이었고,

노가다를 하려면 산엘 오르내리며 미리 체력 단련이라도 좀 해둬야겠단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런저런 이유로 IMF 시절 아버지들은 양복을 입은채 집 가까운 산으로 몰려 들었고,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신은 채 외롭게 산길 주변을 서성거리곤 했었다.

IMF라는 국난이 야기시킨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집 가까운 산엘 갔다가 양복 입은 아버지 한 분이 구둣발로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됐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IMF 때보다 경기가 더 안 좋고 구조조정이 시작됐다는 뉴스가 떠돌더니만

또 다시 아버지들의 수난시대가 시작되는가 싶어 가슴이 아파왔다.


비록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전염병 창궐, 그로 인한 기업 도산과 구조조정이야

아버지들 개개인의 힘으로 막거나 피하기 불가능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아무쪼록 이번만큼은 아무 일도 없는 척 산으로 들로 숨어다니며 혼자 아파하시지 말고

가족들과 함께 그 무거운 짐을 나눠 져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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