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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Apr 20. 2023

"빈 돈봉투로 밑장빼기하지 맙시다, 장모님!"

빈 돈봉투로 밑장빼기 하다 딱 걸린 예비 장모님


<라떼>만 해도 <함팔이>라는 결혼식 오프닝 이벤트가 있었다. 이 오프닝 이벤트 때문에 메인 이벤트인 결혼이 시작도 하기 전에 파탄 나는 경우도 있었다. 친구들 중에 거의 개진상급 도그 베이비가 포진해 있으면 가능한 참사였다.​


오래된 앨범을 정리하다가 문득 함팔이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MZ세대인 우리 딸들이 과연 함팔이를 알까 궁금해 물어봤다. 예전엔 결혼할 때 이런 풍습이 있었는데, 혹시 들어본 적 있느냐고. 딸들은 전혀 들어본 적 없다고 답했다. 하기사 나 역시도 최소 10~20년 간은 함팔이의 <함>자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함팔이란 결혼식 날짜가 잡히면 신랑 측에서 예단 등을 함에 담아 신부 댁에 전하는 의례였다. 그 옛날 전통혼례에선 대개 하인이 이 함을 짊어지고 신부 댁으로 갔는데, 현대로 넘어오면서 신랑 친구들이 놀이 삼아 짊어지고 가기 시작했다.


대개 3~4명 정도 되는 친구들이 한 팀이 돼 나서곤 했다. 그 중 가장 듬직한 체구를 가진 친구가 함진아비 역할을 맡아 오징어를 얼굴에 뒤집어 쓴 채 함을 등에 졌다. 나머지 친구들은 원님 행차에 나발 부는 이방이나 포졸 같은 역할을 맡아 신부 댁 동네 어귀에서부터 "함 사세요!"를 요란하게 외치며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그러면 신부 댁에서는 대기하고 있던 예비 장모와 처제들, 신부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함진아비를 집 안으로 들이기 위해 온갖 사탕발림을 다했다. 미인계는 기본이요, 맛있는 온갖 음식들을 앞세워 한 발이라도 더 신부 댁 쪽으로 유인하려 노력했다. 때론 함진아비 좌우로 달려들어 양쪽 팔짱을 꽉 낀 채 힘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도 펼쳤다.​


하지만 함진아비들이란 게 대개 한 덩치 하는 친구를 가려뽑는 데다가 좌우에 호위처럼 따라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있어 힘으론 이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신부 댁에서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준비해 온 돈봉투를 한 걸음 간격으로 바닥에 깔며 함진아비 발걸음을 유도하곤 했다. 만원, 혹은 2~3만원쯤 담은 봉투를 징검다리 놓듯 함진아비 앞에 좍 놨는데, 그러면 함진아비는 거드름을 피우며 한 걸음 한 걸음 신부 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일련의 과정이 함진아비 일행을 만족시키면 돈봉투를 사뿐히 즈려밟으며 함이 무사히 신부 댁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때 밑장빼기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신부 댁 식구들이라도 있으면 슬그머니 빈 봉투를 중간에 끼워넣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안 들키면 속여먹는 재미를 즐기며 함값도 아낄 수 있어 톡톡히 남는 장사가 됐지만, 들키는 날엔 <빽 도>를 외치며 함진아비가 뒷걸음질을 쳐버리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라떼>까진 이런 풍경이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앞둔 사람들을 둘러싼 정말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신랑 친구들 욕심이 좀 과해지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함값>이라기엔 너무 과한 금액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욕심대로 잘 안 되면 신부 댁 사람들과 싸움까지 벌여가며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신랑 친구들에게 질려버린 신부 댁에서는 "유유상종 아니냐?"며 신랑될 사람 인격까지 의심하게 돼 파혼을 선언하는 사례도 생겼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사회문제화 되기 시작하자 나중엔 누군가 동네 어귀에 나타나 "함 사세요!" 하고 외치기라도 하면 지레 시끄럽다며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들까지 속출했다. 친구 결혼식을 무슨 일생의 돈벌이 기회 정도로 착각한 몇몇 지각없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사태였다. 그 영향인진 몰라도 어느날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함팔이>라는 문화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진 속 장면은 오징어 탈을 쓴 함진아비 일행이 함을 팔러 와서 신부 어머니와 "가자", "못 간다" 공방전을 펼치던 중 신부 측에서 빈 돈봉투를 섞어 밑장빼기를 하다 딱 들킨 모습이다. 함진아비 측에선 빈 돈봉투를 코 앞에 들이밀며 엄중 항의하고, 딱 들킨 신부 어머니는 겸연쩍은 웃음으로 사태를 얼버무리려 드는 상황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제 더 이상은 현실세계 결혼식에선 보기가 힘들어진 "아, 옛날이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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