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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May 13. 2023

살벌한 게임


"60년 이하 죽엇!"

혼잣말처럼 뱉고 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 게임이 이렇게까지 살벌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싶어서다. "죽어"란 단어 어감이 영 입에 안 붙었다. ​


<1962년 8월31일>자로 기록된 전북 김제 소재 한 이발소 영업신고증을 본 뒤 글 한 편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스토리를 어떻게 풀어나가면 내 나이보다 많은 그 육중한 세월의 무게를 <엣지 있게> 독자님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때 문득 TV에서 봤던 게임 하나가 생각났다.


손가락 열 개를 활용해 게임 참여자들이 상대 게이머들을 하나씩 죽여나가는 방식의 게임이었다. 이를테면 내 나이가 40살 이상이고 상대 게이머들 나이가 나보다 어릴 경우 "40살 이하 죽엇!" 하고 공격을 가하는 거였다.


이때 40살 이상 조건에 부합하는 나를 뺀 나머지 게이머들은 모두 손가락 하나씩을 접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참여자들이 돌아가며 상대 게이머들 <킬 포인트>를 공략해 열 손가락 모두를 접게 만들면 최종 승리를 거두는 게임이었다.


그래서 이 게임에 기초해 경력 60년 이하인 사람은 하나씩 <죽어나가는> 스토리를 구상했던 건데, 뭔가 이상했다. TV, 그것도 공중파에서 방송심의위원회가 눈 시퍼렇게 뜨고 째려보고 있는데 아무리 게임이라곤 해도 출연자들이 "죽어", "죽엇" 하고 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못 놀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게임 내용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 정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든가, "죽어" 같은 자극적 용어를 장난처럼 다룸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생명 경시 풍조를 야기할 수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죽어>라 외치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방송심의위원회 베이비들은 사정없이 방송 부적합 판정을 때리고도 남을 터였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나는 인터넷 폭풍검색에 돌입했다. 내 기억이 정확한 지 검증이 필요하단 판단이 뒤늦게 든 거다. 그 결과 내가 <죽어 게임>이라 기억하고 있었던 그것은 사실은 <접어 게임>이었음을 알게 됐다. 손가락을 접고 또 접다 보면 게임에서 <죽어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나는 <죽는다>는 한 단어짜리 축약 버전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오 마이 굿뉴스...



어쨌거나 이 같은 내 기억의 오류 덕분에 "60년 이하 죽엇!"을 컨셉으로 잡았던 김제 한 이발소의 유구한 역사 스토리는 이런 다소 엉뚱한 버전으로 탄생하고야 말았다. 뭐 사실 구구절절한 얘기 백 마디보다야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게 녹아있는 영업신고증 <비급> 한 권, 내공 1갑자를 가뿐히 넘긴 이발고수님이 자신의 애병인 면도칼로 펼쳐보여 주시는 휘황찬란한 도법 한 자락이면 내 생각엔 <엣지 있게> 보여줄 건 다 보여주고도 남는 거 아닌가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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