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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Jan 10. 2024

카드할부 빚내서라도 조의금 내라구?



서울의 한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조의금을 카드 할부로 낼 수 있는 무인결제기가 등장했다고 한다. 지금 당장 조의금 낼 돈이 부족하면 카드빚을 내서라도 '성의껏' 성의를 표하라는 압박처럼 느껴져 입맛이 씁쓸하다.


언젠가부터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축의금 5만원 내고서는 양심없이 부부가 와서 밥을 먹고 갔다"는 류의 배금주의에 물든 뒷담화가 인터넷 바닥을 뜨겁게 달굴 때부터 사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축하>나 <조의> 따위 마음보다는 그 사람이 들고온 봉투 두께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배금주의 시대가 됐으니 사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행복한 고물상>의 저자 이철환 작가가 쓴 <축의금 1만3천원>에 등장하는 눈물 겨운 친구 관계 따위는 갈수록 멸종위기 동물화 돼가고 있는 빌어먹기도 힘든 세상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돈만 보낸 채 와서 밥은 안 먹는 결혼식 하객이 최고의 VIP"라는 농담도 더 이상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됐다. <라때> 배고픈 대학생들이 아무 결혼식장이나 찾아가 하객인 척 행세하며 대충 밥 한 끼를 해결하던 낭만 따위는 저 세상으로 떠난지 오래다.


어쩌면 이렇게 얘기하는 내가 시대에 너무 뒤떨어졌는 지도 모르겠다. MZ식 합리적인 마인드로 바라보면 축의금이 됐건 조의금이 됐건 '기브 앤 테이크'로 서로 줄 만큼 주고 받을 만큼 받으면 되는 건데, 거기에 섣부른 온정주의를 끼워넣는 건 일견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어서다.


하기사 부처님께 드리는 시줏돈도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신용카드로라도 내라며 대웅전 앞에 무인결제기를 설치해 놓는 세상이다. 그 자비로운 부처님조차 이렇듯 얄짤 없는 판에 욕심 드글드글한 인간들에게 도대체 뭘 바라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빚까지 지게 해가며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죽어라 쥐어짜내 받아야만 하는 걸까? 사람 사는 형편이란 건 백인백색 천인천색이고, 사회생활 할 땐 잘 나가던 사람이더라도 세월이 흘러 은퇴하고 나면 몇 푼 안 되는 연금에 의지해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은데, 천편일률적으로 친하면 10만원, 아주 친하면 30만원 하는 식으로 금액을 정해 할부로라도 받아내야 하는 걸까?



친한 친구로부터 청첩장을 받아 들고도 기뻐하긴커녕 축의금부터 걱정해야 한다거나, 꼭 조문가고 싶은 지인 장례식장 입구에서 조의금은 얼마를 하고 카드 할부는 몇 개월로 해야 하나 따위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싶다.


천상병 시인은 자신이 쓴 시를 통해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라며 가난한 삶을 탄식조로 읊조리기도 했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앞으론 돈없는 사람은 <할부 결제할 카드조차 없다면 나는 지인 장례식장에도 영영 가지 못하나?>라고 읊조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욕지기 치미는 시대요, 욕 나오는 세상이다.




<개 장례식장 오라더니 조의금함이... 얼마 내야 하나요 vs 꼭 내야 하나요">라는 제목 아래 한 직장인이 블라인드에 올린 사연을 토대로 한 기사도 있었다. 친구가 강아지 장례식 하는데 와줬으면 한다는 연락을 해와 갔더니 장례식장에 조의금함이 있더라는 거다. 나중에 친구가 서운해 할까 봐 조의금 5만원을 하긴 했는데, 과연 이게 맞나 싶다고 글쓴이는 하소연했다. 시대가 참 많이도 변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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