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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Jan 29. 2024

통신요금 할인 미끼 보이스피싱에 당할뻔했다

이미지출처: 픽사베이


나는 보이스피싱 같은 건 절대 당하지 않을 인간이라고 평소 생각을 해왔었다. 업무상 관련된 경우가 아니면 모르는 번호는 웬만하면 잘 안 받는 편이고, 어쩌다 마케팅성 전화와 연결돼도 단호하게 잘라 버리는 스타일이며, 문자나 카톡 등에 첨부된 링크는 믿을 만한 사람한테 온게 아닐 경우 아예 클릭을 안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하마터면 보이스피싱을 당할뻔 했다. TOP(Time, Occasion, Place)를 너무나도 적절하게 잘 끼워맞추는 바람에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어서 잠시 방심을 했던 모양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심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통화하는 동안에는 거의 캐치하기 힘들 정도로 TOP가 아주 적절하고 자연스러웠다.


먼저 타임 T다. 불과 하루 전 나는 3년 약정이 끝난 통신사와 결별을 하고 가정용 인터넷과 IPTV를 다른 통신사로 갈아탔다. 3년 이상 쓴다고 해서 특별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마침 다른 통신사에서 좋은 신규 가입조건을 제시해왔길래 주저없이 갈아타기로 한 건데, 보이스피싱범은 이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타고 들어왔다.


불과 하루 차이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내 이름을 확인한 뒤 "인터넷 신규 설치 건으로 전화드렸다"고 말을 걸어왔던 거다. 우리 가족과 새로 갈아탄 통신사 외엔 제3자가 알 리 없는 내용을 갖고 연락해 왔으니 내 입장에선 별로 경계할 틈이 없었다. TOP의 두번째 요건인 Occasion이 충족된 셈이다.


그렇게 첫 대화의 물꼬를 텄고, 상대편에서 "그런데 휴대폰 결합 요금할인에 대해선 안내를 받으셨어요?"라고 물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잖아도 새로 갈아탄 통신사 쪽 알뜰폰을 사용 중이라 결합 요금할인이 궁금했던 참이라 나는 "알뜰폰도 결합 할인이 가능한가요?" 하고 관심을 표했다. 마지막 요건인 Place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상대편은 기름에 절인 듯한 매끄러운 혀로 나를 유혹해대기 시작했다. 현재 쓰시는 알뜰폰 요금제에서 저희 쪽으로 통신사 옮겨 한 달에 몇 천원만 더 쓰시면 LTE가 아닌 5G요금제로 데이터를 무제한 쓸 수 있으며, 1년 간 유지해주는 조건으로 현금 36만원을 지원해 드리겠다 어쩌구 하는 게 주된 골자였다.


솔직히 귀가 솔깃했다. 한 달 몇 천원 더 내봐야 기존 알뜰폰 요금제와 비교해 1년이면 5만원 남짓 차이밖에 안 나는데 반해 36만원이나 되는 현금을 받을 수 있으니 개이득이고, 사용량 제한이 걸려있는 알뜰폰 LTE 대신 5G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조건이라면 그 또한 손해날 일은 없다는 판단이 들었던 거다.


그렇게 파란불 일변도로 쭉쭉 앞으로 나아가던 상담에서 갑자기 노란불이 켜진 건 월 8만원짜리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인터넷 결합 조건으로 4만원에 해주겠다는 부분에서였다. 아무리 인터넷 결합 조건이라는 옵션이 걸려있다 하더라도 그렇지 8만원짜리 요금제를 10~20%도 아닌 반을 확 꺾어 할인을 해준다는 게 상식적으로 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고개를 좀 갸우뚱거리고 있는 찰나였는데, 이때 상대편에서 "혹시 PASS앱 사용하시면 제가 링크 하나 보내드릴 테니까 본인 인증 절차 진행해 주세요" 하고 말을 해왔다. 이를 듣는 순간 문득 "링크라고라? 이거 좀 느낌이 쎄한데..." 하는 생각과 함께 머릿 속에 빨간불이 반짝 켜졌다.


적색 신호였다. 더 좋은 요금제 조건에다가 눈먼 현금 36만원까지 생긴단 생각에 다소 들떠 있던 내 기분이가 차갑게 가라앉으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조건은 마음에 들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갔으면 자칫 큰일날 수도 있었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편 번호가 개인 휴대폰이 아니라 등록된 어디 통신사고객센터 정도만 됐어도 99.99% 넘어갔을 만큼 나름 설득력있는 내용이었고, 귀가 솔깃할 만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해당 통신사고객센터와 직접 한번 통화해 볼 결심을 했다. 고객센터가 아닌 개인 휴대폰 번호로 이러이러한 전화가 걸려왔는데, 당신네 통신사에서는 이런 식으로도 마케팅을 하느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십중팔구 아닐 거라고 짐작하긴 했었지만, 역시나 고객센터에서는 그런 일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8만원짜리 휴대폰 요금제를 인터넷 결합 조건으로 반값에 해주겠다 운운한 대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객센터 직원은 "고가의 인터넷 요금제를 사용하는 고객의 경우 여러 가지 옵션을 묶으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확인해주긴 했으나, 인터넷과 IPTV를 합쳐 5만원이 채 안 나오는 상품에 가입한 내 경우는 당연히 그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고객센터와의 통화를 마치며 나는 '하마터면...'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폰에 악성코드 같은 게 심어져 은행이고 카드고 다 털릴 뻔 했는데, 정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이라는 게 예전처럼 어눌한 조선족 말투로 어수룩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점점 시나리오를 갖춘 그럴 듯한 상황극으로 진화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등에 소름이 돋았다.


자나깨나 보이스피싱 조심, 꺼진 보이스피싱도 다시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관도, 검사님도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었다는 얘기가 그냥 우스개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TOP를 척척 맞춘 보이스피싱이라면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도 눈 뜬채 코 베이기 딱 좋은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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