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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울린 노스님의 범종 소리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 #7

by 글짓는 사진장이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었다.

양손 모두 지팡이에 의지한 채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모습이 일견하기에도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 노스님이었기 때문이다.

행자들에게 봉양 받으며 여생을 보내야 할 연배와 건강 상태로 보였는데, 어이없게도 범종 치는 일을 하러 나오셨다.

타종 시간까지 좀 남아서인지, 아니면 거처로부터 힘든 걸음을 한 때문인지 노스님은 범종각 안 한쪽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셨다.

그리고 잠시 후 때가 된듯 느릿느릿 일어나 한 손으로 당목(撞木)을 움켜쥐셨다.

남은 한 손으로는 범종각 울타리를 꼭 움켜잡아 몸 중심을 다잡으신 뒤 아기 볼 어루만지듯 살살 당목으로 당좌(撞座) 부분을 건드렸다.

친 것도 아니요, 안 친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로 당목과 당좌가 살짝 맞닿은 듯한 미미한 부딪침이 일어났다.

좀 떨어진 거리에선 범종 소리가 거의 들리지도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희미한 종소리가 범종각 주변에 나직이 울려퍼졌다.

범종 소리라곤 TV 중계로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접해본 게 전부라 할만큼 문외한인 나는 '기력이 쇠한 노스님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을 설핏 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잠시 후 천둥 같은 큰 종소리가 사방을 감싼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까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자기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 보일 만큼 기력이 약해 보이던 노스님이 별안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는지 벼락같은 기세로 당좌를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범종은 '데~엥~~~' 하는 큰 울음소리를 토해낸 뒤 메아리 치듯 몇 번을 반복해서 사자후 같은 깊은 울림을 토해냈다.

순간 종소리와 함께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그 무엇인가가 내 가슴을 관통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굳이 노스님이 범종을 타종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뭐 별거 있겠는가, 노스님이 이렇게 중생들을 위해 없는 힘이나마 있는 힘을 다해 범종 한 번씩 쳐주는 게 다 그런 거지 싶기도 했다.

타종이 끝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내 가슴 속엔 청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우렁찬 종소리가 불러 일으킨 잔잔한 파문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종을 마친 노스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한 쪽에 세워뒀던 쌍지팡이를 다시 챙겨든 채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거처로 돌아가고 계셨다.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교신도도 아닌 주제에 왠지 모르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노스님, 부디 성불하시길...' 하는 기원이 입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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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 소리가 너무 인상 깊어 그 일 직후 범종 관련 정보를 검색해 봤다. 종소리도 소리려니와 천년고찰 실상사에 걸린 범종쯤 되면 그 내력이 좀 남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쉽게도 해당 범종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비록 내가 본 그 범종이 아니라 다른 범종이긴 했지만, 실상사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 지도가 새겨진 아주 특별한 범종이 있다는 게 그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물라도 실상사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호국사찰로도 유명한 실상사엔 그런 까닭에서인진 몰라도 대웅전 격인 보광전 안에 일본지도와 우리나라 지도가 새겨진 범종 하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범종 당좌 부분에 일본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실상사 스님들이 그동안 너무 열심히 두들겨 댄 덕분에 현재는 홋카이도와 규슈 지방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 전설과 범종 타종에 얽힌 이야기로 인해 일제시대엔 주지 스님이 일본군에 잡혀간 적도 있고, 범종 타종을 한동안 금지 당하기도 했었다고 하니 실상사를 찾을 일이 있으면 한번 눈여겨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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