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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조 경기 도중 큰딸이 설거지를 자청한 이유

소소잡썰(小笑雜說)

by 글짓는 사진장이

"오늘은 내가 설거지할게!"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어제는 웬일로 큰딸이 빈 그릇들을 와다닥 챙겨들고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평소엔 어떻게든 설거지 당번 한 번 면해보려 기를 쓰고 악(?)을 쓰던 녀석이 정말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큰딸은 설거지 당번을 결정하는 가위 바위 보에서 지더라도 누가 늦게 냈니 어쩌니 하며 결코 쉽게 승복하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으니까요.


큰딸이 이렇게 설거지 당번을 자청하고 나선 이유는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경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일전으로 벌어진 여자복식 김소영-공희용조 경기가 마침 저녁식사 시간대와 겹쳤고, 그 중 하일라이트인 2~3세트가 밥 먹는 시간 중 펼쳐졌었죠.

세트 스코어 1대0으로 우리가 앞선 상황이었지만, 2세트는 큰 점수차로 일본 팀이 앞서더니 끝내 우리 팀이 패해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3세트는 시작부터 난형난제, 용쟁호투 그 자체였습니다.

박 먹는 내내 숟가락질을 잊게 만들만큼 양 팀은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경기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승부는 정말 간을 쫄깃하는 만드는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평소 쫄보(?)인 큰딸은 이 같은 경기 진행을 지켜보며 "내는 몬본다, 심장이 떨려서..." 하며 호들갑을 떨더니 결국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내가 설거지할게" 하고 말입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 순간순간들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설거지를 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는 사이 김소영 공희용 조 경기는 18대20으로 일본 팀이 매치포인트를 먼저 찍으면서 판세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아, 이대로 지고 마는 건가?' 하고 우리 가족 모두 기대를 막 접으려는데, 갑자기 우리 팀이 막판 스퍼트를 하듯 힘을 내더니 순식간에 20대20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이어 21대21, 22대22 하는 식으로 7차례나 듀스를 이루며 살얼음판 같은 승부를 이어 가더니, 공희용 선수의 멋진 스매싱으로 마침내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설거지를 다 마친 뒤까지 이어지는 이 치열한 공방을 흘낏 쳐다본 뒤 차마 못 지켜보겠다며 제 방으로 도망갔던 큰딸이 순간 "대만힌국 만세!" 하며 튀어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큰딸은 제 방에 간다며 들어갔다가 궁금증을 못내 참지 못해 방문을 빼꼼 연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갑작스런 큰딸의 등장에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우리 가족은 반사적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4강 진출보다, 금메달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는 사실보다 일본을 이겼다는게 솔직히 더, 만 배쯤 더 기뻤습니다.

적국이나 다름없는 일본의 심장 한 가운데서 어린 선수들이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와 객관적 전력의 열세를 모두 극복하고 어렵게 따낸 승리였기에 그 감동은 더 컸습니다.


흥분이 좀 가라앉은 뒤 곰곰 생각해보니 상대가 일본 팀이라서 이길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2위라는 일본 팀 세계랭킹이라든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큰 대회 경험,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까지 더해 객관적으로 한 수 위 전력을 갖춘 일본 팀을 이길 수 있는건 오로지 불굴의 정신력 밖에 없었으니까요.

마치 이순신 장군이 12척 밖에 남지 않은 배를 이끌고 왜국의 100척 넘는 배를 대파한 것처럼 불굴의 정신력이 뒷받침 될 때 객관적 전력 차이라는 건 단숨에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일전만큼은 절대 질 수 없다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불굴의 승부욕이 두 선수에게 본인들 실력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얹어줬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면 너무 오버일까요?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안겨준 김소영 공희영 두 선 수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여세를 몰아 이번 올림픽에선 꼭, 반드시, 기필코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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