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후반은 물론 4~50대에 접어든 뒤까지도
하얗게 삐져나온 당신 머리카락을 '새치'라 주장하는 아버지들이 많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를 봐도 그렇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새치란 건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푸릇파릇한 2~30대 젊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인데 말이다.
우리 아버지 역시 환갑 직전까지도 당신의 흰머리를 새치라 강변하셨었다.
은퇴하기 전까지 서울에 있는 중소규모 제지회사의 경비 일을 하셨었는데,
'흰머리=나이 들고 힘없음'의 상징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피부가 좋지 않아 고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늘 염색을 하시곤 했다.
요즘은 자극 적은 천연염색약들이 많이 나와서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옛날 염색약들은 냄새부터 여간 독한 게 아니라서 아버지는 고생을 참 많이 하셨었다.
이발소에 가서 독성을 완화시키는 뭐라도 좀 머리 주변에 바른 다음 했음 나았을 텐데
먹고 사는 일 외엔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 구두쇠시다 보니 집에서 생으로 염색을 하곤 했다.
더 큰 문제는 당신이 피부염을 갖고 있어 좀만 자극을 받아도 온갖 군데가 다 시뻘겋게 뒤집어진다는 거였다.
더군다나 돈없는 서민이 피부 좀 따끔거린다고 병원 가는 것은 언감생심 꿈조차 꾸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한증탕에 가서 땀을 흠뻑 빼는 걸로 치료 아닌 치료를 하며 버티시곤 했다.
지금은 흰머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곤 하지만,
내 주변을 둘러보면 아직도 우리 아버지처럼 많은 아버지들이 독한 염색약에 머리를 내맡기고 있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은 오히려 흰머리를 트레이드마크처럼 내세우기도 하고,
푸르파릇한 MZ세대 스타들도 부러 흰머리로 염색해 이색적인 멋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남 밑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월급쟁이들에겐 여전히 흰머리로 다니는게 적지않이 부담스런 일이어서다.
'너넨 늙어봤니? 우린 젊어봤다' 하는 누군가의 자신감 넘치는 일갈처럼 우리 아버지들이
경험과 연륜이 묻어나는 당신들의 흰머리에 대해 좀 더 너그럽고 당당해지셨음 싶지만,
흰머리를 굳이 새치라 우기며 남의 눈치를 살피느라 부득부득 염색을 고집하시는 것은
어쩌면 밀림같은 거친 세상 속에서 카멜레온 같은 변신술을 부려서라도 기필코 살아남고자 하는 아버지들만의 보호색 같은건 아닐까 싶어 안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