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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우산도둑'이었다

소소잡썰(小笑雜說)

by 글짓는 사진장이

지금은 사은품으로 마구 뿌려댈 정도로 흔해졌지만, 내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우산은 제법 신경을 써 관리해야 하는 물건에 속했다. 대나무 살에 투명한 파란 비닐을 덧씌워 엉성하게 만든 일회용 우산조차 쓸 수 있는 한 몇 번이고 반복해 사용했을 정도였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종종 우산이 부족해 식구 중 누군가는 우산없이 다녀야 하는 일도 빈번했으니 말이다.


어린시절 나는 새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게 소원이었다. 아버지나 형들이 아침 일찍 차례로 쓸만한 우산들을 먼저 챙겨들고 나가면 막내인 내게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우산살 몇 개가 삐죽이 튀어나와 모양새가 사나운 헌 우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가노라면 자꾸만 다른 친구들의 멀끔한 우산들이 눈에 아른거려 심통이 나곤 했다.


새 우산에 대한 갈망은 간혹 나를 우산 도둑으로 만들기도 했다. 참다 참다 도저히 못참겠다 싶을 때면 나는 주번이라 일찍 가야 한다는 따위의 핑계를 대고 일찌감치 등교길에 나섰다. 그때 슬그머니 형들의 우산 중 괜찮은 것을 하나 챙겨들고 줄행랑을 쳤다.


문제는 그 후였다. 모양새 사나운 우산을 들고나가 망신 아닌 망신을 당했을 형들이나 부모님으로부터 혼이 나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니 아예 논외로 치더라도 그렇게 형들 우산을 몰래 들고 간 날은 이상하게도 꼭 문제가 생겼다. 이를테면 반 친구들 모두의 우산을 한데 모아놓은 우산함에서 유독 내 것만 없어진다든가 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또 평소 들고 다니던 우산이 아님을 재빨리 눈치챈 친구들이 짓궂게 칼싸움을 걸어오는 것도 그런 경우에 속했다.


약점이 있는 터라 처음엔 친구들의 그런 도발을 애써 참았지만, 계속해서 우산 끝으로 꾹꾹 찔러대며 시비를 걸어오는데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니고 어린 내가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맞대응을 해 친구들과 한바탕 칼싸움을 벌이다 보면 멀쩡했던 우산은 얼마 못가 살이 부러지거나 휘어져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기 일쑤였다.


그런저런 이유로 빈 손 또는 다 망가진 우산을 들고 집에 돌아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절한(?) 응징이었다. 형들 것을 몰래 갖고 나간 터라 멀쩡하게 잘 들고 갔다 왔어도 혼이 날 판인데 아예 잃어버리거나 다 망가뜨려 돌아왔으니 혼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전 은행에 갔을 때의 일이다. 현관 입구를 들어서는데 우산꽂이대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대충 놓인 우산들이 보였다. 은행 측에서 빗물이 실내를 어지럽힐 것을 우려해 우산을 그곳에 두고 가도록 했는가 보다 하며 별 생각없이 내 우산도 그곳에 둔 채 은행 창구로 향했다. 비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마침 사람이 별로 없어 일이 금방 끝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탓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일을 보려는 창구 앞에 서고 보니 앞사람의 일처리가 좀처럼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지루해진 나는 실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저마다 우산을 챙겨든 채 은행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늦게 '입구에다가 우산을 대충 던져놓은 채 오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다시 가서 들고 오기도 뭐해서 그저 앞사람의 일이 빨리 처리되기만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처럼 부모님이나 형들에게 호되게 혼날 일도 없는 터라 '누가 들고 갈 테면 들고 가봐라' 하는 배짱이었다.


그렇게 한 30분 쯤 지났던 듯하다. 일처리를 모두 마치고 별 기대도 않은 채 은행 현관 쪽으로 향했는데, 처음 놓았두었던 모습 그대로 우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건만 그것을 본 순간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심봤다'는 한 마디가 내 머리 속을 맴돌 정도였다. 누가 들고 갈 테면 가보라고 배짱을 부리긴 했어도 속으로는 우산이 그 자리에 무사히 잘 있어주기를 무척이나 간절히 바랐던 모양이다.


빗 속을 걸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형들에게 엄청 혼날 각오까지 해가며 멀끔한 우산 하나 챙겨들고 학교 가기를 꿈꿨던 가난이 없었더라면, 자칫 잃어버릴 뻔했던 우산 하나를 무사히 되찾았다는 이유로 그런 작은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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