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신령 말고 아버지를 믿을걸 그랬다
소소잡썰(小笑雜說)
휴가를 맞아 집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휴가 내내 방구들만 지고 있을거야 정말?" 하는 아내의 성화에 등 떠밀려 집을 나섰다. 아내나 나나 여름철 휴가지로 인기 높은 해수욕장이나 계곡 같은 사람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다가 코로나 감염 우려도 있어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잠시 콧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어디로 갈까 한참을 고심하다가 결국 우리 부부가 목적지로 정한 곳은 지리산이었다. 뱀사골이나 달궁계곡 같은 곳들은 피서객들로 넘쳐나 혼잡하겠지만, 한낮 기온 35도를 넘나드는 이 더위에 산행을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아내도 며칠 전부터 산에 한 번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중이라 이래저래 안성맞춤이었다.
지리산에 가자는 내 제안에 아내는 반색을 했다. 산을 좋아하는 아내와는 달리 평소 산이라면 사진 찍을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발걸음을 안 하는 내가 웬일로 지리산씩이나 가자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곤 남편이 마음을 바꿔 먹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산행 채비를 차렸다.
가는 길에 평소 자주 가는 단골 냉면집에서 맛있는 냉면으로 배까지 든든히 채운 우리 부부가 지리산에 도착한 건 오전 11시쯤이었다. 우리가 목표로 정한 곳은 지리산의 많은 복(福)을 차지하고 있다 하여 만복(萬福)이란 이름이 붙여진 만복대였다. 산행에 취약한 내 사정을 감안해 출발점은 자동차로 만복대와 가장 가까이까지 갈 수 있는 정령치 휴게소로 결정했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어 지팡이겸 우산도 하나 챙겨든 채 우리 부부는 산행을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니 만복대까지는 2km를 가야 했다. '산길 2km라니 내가 저 죽을 짓을 저질렀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역을 출발한 기차였다. '기왕 죽을(?) 거, 남자답게 장렬히 죽어줘야지!' 하는 다짐을 아내 몰래 다지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7년 전인 40대 때 일이긴 하지만, 지리산 제일봉인 천왕봉을 오른 적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근거 있는 자신감에 빠지게 만든 측면도 있었다. 배낭 하나 짊어진 채 산 아래서부터 올라가 천왕봉까지 오른 실력인데, 해발 1,200미터 가까운 정령치 휴게소에서 출발해 만복대에 오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착각한 것이다. 만복대 해발이 1,438미터니 평지나 다름없는 능선을 사부작사부작 밟다가 200미터 남짓 오르막길을 오르면 된다 계산한 거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산알못, 산을 잘 알지 못하는 자의 멍청한 계산법이었다. 만복대까지 가는 길은 거의 쉼없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연속이었고, 불과 반도 못 가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가빠져 온몸에서 전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초반엔 좀 힘들어하던 아내는 절반쯤 갔을 때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 느낌이네. 아자 아자!" 하며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만복대까지 1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나 다시 3분의2쯤 더 나아갔을 때였다. 만복대가 눈에 들어오면서 이제 막판 오르막 구간을 남겨둔 시점이었는데, 사방이 펑 터진 나무계단 구간을 지나려 할 때 갑자기 어디선가 말벌 두 마리가 나타나 길목을 가로막았다. 꿀벌만 주변에서 얼쩡거려도 기겁을 하는 편인 아내는 순간 얼음이 돼 굳어버렸다.
장수말벌쯤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덩치 큰 두 놈이 아내 몸 주변을 계속 윙윙거리며 맴도는데, 아내뿐 아니라 나도 겁이 덜컥 났다. 평일이라 인적도 거의 없는 산 속에서 자칫 말벌에 쏘이기라도 했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119 헬기를 출동시킴으로써 뉴스에 나갈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판단됐다.
고지가 바로 코 앞이었건만 결국 아내와 나는 아쉬움을 삼킨 채 발길을 되돌리기로 결정했다. 만복대에 가서 복을 좀 나눠받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산의 터줏대감이자 맹수나 다름없는 말벌과의 다툼을 불사해 가면서까지 굳이 계속 산행을 해야 할 절실한 이유는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그 즈음 이미 다리가 너무 후둘거려서 여차하면 아내 혼자 만복대까지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 참이었기에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단 한결 가벼웠다. 올라갈 땐 오르막 구간이 많았었는데, 내려갈 땐 그 반대가 된 덕분이다. 덕분에 쉬엄쉬엄 쉬는 기분으로 내려올 수 있었는데, 쉬는 김에 좀 더 쉬어가자 싶은 기분이 들어 앞이 툭 터진 바위가 나오자 그곳에서 잠시 앉아있다 가기로 했다. 만복대 기념사진을 못 찍었으니 거기서라도 아쉬운대로 사진 한 장 남겨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유유자적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내 머릿 속으로 잊고 있던 생각 한 가지가 번쩍 떠올랐다. 간밤에 꿨던 아버지 꿈이 그것이었다. 췌장암에 걸려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시느라 돌아가실 무렵엔 안색이 몹시 초췌했던 아버지는 지난밤 내 꿈 속에선 건강하실 때 그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계셨었다. 그리고 평소 과묵하시던 성격과는 달리 나와 무슨 대화를 계속 주고 받으며 시종일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그 꿈에서 깨는 순간 나는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시나 보다 하는 안도감을 느끼는 한편 '이게 혹시 꿈을 통해 자손들에게 뭔가를 보여준다는 그 현몽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되든말든 오늘은 복권을 한 장 사야겠다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리산 산행에 나서게 되면서 그만 경황이 없어 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잊어 먹을까 싶어 그 자리에서 바로 스마트폰을 이용해 온라인 복권 구매에 나섰다. 마침 머문 장소가 민족의 영산 지리산 하고도 만 가지 복을 차지하고 있다는 만복대 코 앞이니 여기서 복권을 사면 지리산의 신령한 기운과 산신령님이 도와주실 거란 나름 과학적인(?) 믿음도 있었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하늘이 내려주시는 복을 걷어차면 그것이 오히려 화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도 내 행동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복권 추첨 결과는 허무하게도 꽝이었다. 아버지와 나, 아내 몫으로 각 한 장씩 총 3장을 샀던 복권은 단 하나만 천원짜리에 당첨됐을 뿐 나머지는 완전 꽝이었다. 아내와 나 둘 다 복권이나 경품 같은 운빨을 필요로 하는 것들과는 원체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평소 잘 거들떠 보지도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아버지 현몽에 지리산의 신령한 기운까지 얹었기에 아주 약간은 기대를 했었건만 결과는 언제나처럼 '내 복에 무슨'이었다.
꽝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며 깔깔댔다. 빈정이 좀 상한 나는 왜 그럴 줄 알았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아버지 꿈을 꿨으면 아버지한테만 빌었어야지, 지리산 산신령한테 양 다리를 걸치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신 게지" 하며 나를 놀렸다. 딴은 맞는 말이다 싶어 나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내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참회했다. '그래, 촌수를 따져보나 지난 몇 십 년동안 구축해 온 인간적인 관계를 생각하나 지리산 산신령보다는 우리 아버지를 믿고 따랐어야지. 내가 아버지였어도 너처럼 양 다리나 걸치는 고약한 자식놈한텐 현몽해 복을 주려다가도 다시 거둬가 버리고 말겠다, 이 화상아!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