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 '꼴찌들'에게 보내는 갈채
소소잡썰(小笑雜說)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일약 신데렐라로 등장한 선수가 하나 있었다. 여자육상 800미터와 1500미터, 3000미터 세 종목에 걸쳐 3관왕을 달성한 '라면소녀' 임춘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시안게임에서 그녀가 거둔 전무후무한 성적도 성적이었지만, 임춘애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들이 부러웠구요'라는 언론 기사 때문이었다. 나중에 본인 입으로 "어릴 때 가난하게 산 건 사실이지만 라면만 먹고 살았다는 언론 기사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히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해당 기사로 인해 임춘애라는 선수를 '헝그리 정신'의 대명사쯤으로 여겨 더 인상깊게 기억하게 됐다.
사실 라면 운운한 언론 기사는 임춘애 소속학교 육상부 코치가 당시 육상부의 열악한 운동환경을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와전된 거였다. "육상부에 지원이 부족해서 애들이 간식으로 라면만 먹고 운동한다. 조금 형편이 좋은 학교는 우유도 지원한다더라"고 얘기한 걸 기자가 앞뒤 잘라먹은 채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뛰었다'고 침소봉대해 보도한 거였다. 아이러니한 건 임춘애 본인은 우유를 먹으면 탈이 나서 아예 우유를 마시지도 못하는 체질인데 말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에게 덧씌워진 라면소녀 이미지를 매우 싫어했던 임춘애는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체력 보강을 위해 도가니탕과 삼계탕, 뱀탕까지 먹었어요. 라면만 먹고 어떻게 뛰겠어요?"라고 적극 해명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번 사람들 뇌리에 각인된 라면소녀 이미지를 벗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사람들은 '헝그리정신'이 필요할 때마다 라면소녀 임춘애를 단골로 소환했기 때문이다.
아쉬움과 감동 속에 막을 내린 도쿄올림픽을 지켜보며 나는 문득 이 '라면소녀' 임춘애를 머릿 속에 떠올렸다. 양궁 3관왕을 위시한 쟁쟁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 틈바구니를 뚫고 나와 조연이 이난 주연급으로 우리 국민들 앞에 우뚝 선 '아름다운 꼴찌(?)들' 덕분이다. 이 아름다운 꼴찌들 덕분에 과거 임춘애가 우리 국민들에게 선물했던 류의 스포츠가 주는 감동을 라면 스프 MSG를 뺀 순수한 맛으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장 김연경 선수를 중심으로 12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쳐 부상을 무릅쓴 눈물겨운 투혼을 펼친 끝에 4강 신화를 이룩한 여자배구팀은 물론이요, 결승점 600미터를 남겨두고 근육경련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끝까지 완주한 뒤 휠체어에 실려나간 여자마라톤 최경선이 보여준 불굴의 투혼, 가능한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짰지만 그래도 체중이 오버되자 아낌없이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여자유도 강유정 등 아름다운 꼴찌들을 보며 올림픽은 메달이 전부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재삼 느꼈다. 그것은 누가 더 절실한가를 겨루는 절실함의 싸움이었다.
최고는 아니지만 마지막 한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한 점 후회가 남지 않도록 경기에 임하는 모습, 승부는 이미 끝났을지언정 성치않은 몸을 무릅쓴채 주어진 코스를 끝끝내 완주해내는 불굴의 투혼, 메달 여하를 떠나 올림픽 참가 그 자체를 위해 스물다섯 젊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임없이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는 열정 등 이 모든 게 올림픽이라는 감동 드라마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뼈대임을 우린 그동안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었다. 외형적인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 의지의 한계를 넘나드는 정신이 더 중요함을 잊고 있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메달보다는 선수 개개인이 인간의 한계 극복을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가에 주안점을 둔 순수 체육인들의 축제가 바로 올림픽인데, 어느 순간부턴가 금메달에만 눈이 멀어 모두들 "금, 금!"만 목놓아 외치는 배금주의자들이 돼버렸다. 열심히 땀 흘려 노력한만큼의 댓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도깨비 방망이를 흔들고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주문이나 외치며 어디 하늘에서 금 은이 절로 떨어지길 바라는 요행꾼이 돼버렸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아름다운 꼴찌들은 그런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올림픽은 배금주의에 빠진 맹신도들 따위를 위한 메달 따먹기 놀음이 아니라고 강스파이크를 때렸고, 참가에 의의를 두긴커녕 1등 경쟁에만 눈이 뒤집혀 있는 우리 멱살을 붙잡아 업어치기 한 판으로 개구리 패대기 치듯 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이제 갓 막을 내린 도쿄올림픽은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운 꼴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일깨워줬다. 여자배구가 보여준 것처럼 상대적 전력이 설령 딸린다 하더라도 선수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영혼을 갈아얹으면 얼마든지 실력 이상의 감동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고, 마라톤의 최경선이나 유도 강유정처럼 불굴의 의지와 투혼을 발휘하면 메달리스트 이상의 큰 감동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줬다.
덕분에 드라마는 스포츠가 될 수 없지만 스포츠는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번 도쿄올림픽을 통해 실감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감동적인 드라마가 어디 있겠는가? 값진 메달 획득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을 선물한 메달리스트들은 물론, 웰메이드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장면들을 선물해 준 우리들의 아름다운 꼴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