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설 졸업하던 날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 #10

by 글짓는 사진장이

"이 작가, 오늘은 나 사진 좀 몇 장 찍어주게나"


전북 임실군에 위치한 한 시골 5일장 장날,

곳간에 쥐 들락거리듯 열심히 들락거리며 여러해 동안 두텁게 안면을 쌓아온 덕분에

꽤 여러 명의 시장 어르신들과 나름 돈독한 관계를 쌓아놓은 전통시장이 하나 있다.

그곳에 가면 유독 갈 때마다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 어르신 한 분이 계셨는데,

어느날 문득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부탁을 건네오셨다.


"저야 사진 찍으러 오는 놈이니까 어려울건 없습니다만,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신가요?" 하고 내가 여쭙자

어르신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시크하게 "응, 오늘은 내가 졸업하는 날이야" 하고 말씀하셨다.

"졸업이요? 학생도 아니신데 웬 졸업이요?" 하고 내가 다시 여쭙자 어르신은 쑥스럽다는듯

"오늘부로 여기서 장사를 그만둔단 얘기지" 하고 말씀하셨다.


조금 놀랍기도 하고 의외란 생각도 들어서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어요?" 하고 여쭈니

"몸도 예전같지 않구, 장사도 영 신통치 않아서 말이지..." 하고 어르신은 말꼬리를 흐리셨다.

유행가 가삿말마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50년 넘는 긴 세월동안 한결같이

온갖 풍파를 무릅써가며 어렵게 이어온 가게를 접으려니 만감이 교차하시는 듯 했다.



졸업(?) 사진을 찍고 난 후 어르신은 단골손님들이 지나갈 때마다 한 분씩 가게로 불러 들여서는

그동안 고마웠노라며 손에 잡히는대로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들을 선물로 안겨주셨다.

처음엔 '이 양반이 어디서 새로운 판매방법이라도 배워 왔나?' 생각하는듯 의아한 표정을 짓던 단골들은

어르신이 이날 부로 장사를 접으신다고 하자 다들 제 일처럼 안타까워하고 서운해했다.


그러더니 선물이라고 쥐어주는 물건을 마다한 채 한사코 물건값을 어르신 웃주머니에 우겨넣어 주셨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물건값이 비싸니 싸니 한참동안 줄다리기를 하며 "깎아달라", "안 된다"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흥정이 다 끝난 뒤에도 "단골이니 덤으로 하나 더 줘라", "나도 남는거 하나 없다" 입씨름을 했을 판인데,

이날은 달랐다.


남부럽지 않게 건강한 몸뚱아리 하나와 젊음을 밑천 삼아 맨손으로 장사에 나섰고,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잡는단 말을 금과옥조 삼아 새벽잠을 설쳐가며 오일장들을 돌아다녔을 어르신.

햇빛 피할 지붕 하나, 비바람 막을 가림막 하나 없어 길 위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히 이 동네 저 동네 오일장을 누비며 열심히 살아오신 덕분에 가게도 한 칸 장만했다.

그리고 이제 겨우 먹고 살만해졌나 싶으니 어느덧 50년 넘는 세월이 지나 있었고,

어느덧 졸업할 나이를 맞고 말았다.


그렇게 50년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굳건히 장터를 지켜온 전설적인 장꾼 한 명이 문득 우리 곁을 떠났다.

얼떨결에 그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게 된 내 카메라 셔터는 무겁게 떨리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랫층 깡패 윗층 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