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층 깡패 윗층 웬수

소소잡썰(小笑雜說)

by 글짓는 사진장이


얼마 전부터 아내는 아침 5시40분만 되면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몽유병 환자처럼 안방 문을 나서곤 한다. 눈도 제대로 못뜬 채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마치 유령 같기도 하다. 다행히 해가 길어 날이 훤했기 망정이지 컴컴했으면 좀 무섭단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어나 아내가 향하는 곳은 거실 베란다다. 보다 정확히는 열대야 때문에 활짝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이다. 마치 뭐에 쫓기듯 서둘러 베란다 창문 손잡이를 붙잡은 뒤 그 어떤 것에도 틈입할 새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굳게 닫아 건다. 그리고는 다시 몽유병 환자처럼 휘청거리며 안방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곤 한다.


아내에게 이같은 몽유병 아닌 몽유병이 생긴 이유는 아랫층 깡패 같은 이웃사촌 때문이다. 처음엔 안방 화장실에서 아침마다 담배를 피워 대 이웃들을 괴롭히더니만, 그 집 안방 마님으로부터 호되게 혼쭐이 났는지 어쨌는지 어느날부턴가 거실 베란다 쪽으로 흡연 장소를 옮겨버린 까닭이다. 아마 거기서 제 집 안으로 통하는 중간 문은 꼭 닫은 채 피우지 싶다.


담배 연기라면 길거리를 지나다가 잠시 스치는 것조차 질색하는 아내인지라 아침마다 아랫층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담배 냄새는 아내 꼭지를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다 말겠지 참기도 하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주의를 당부하는 방송도 해봤다. 또 엘리베이터 내 게시판에 '담배 연기 때문에 고통 받는 이웃이 있으니 아파트 실내 흡연을 제발 삼가해 달라' 점잖게 당부하는 글도 붙여봤다.


하지만 아랫층 깡패같은 이웃사촌은 우이독경 막무가내였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성실하기까지 해서 평일은 아침 5시45분, 주말은 아침 7시에 정확하게 거실 베란다로 출근해 담배 연기를 풀풀 날려 보냈다. 마치 이웃주민들에게 안녕히 잘 주무셨냐고 아침 인사라도 건네듯이 말이다.


곤하게 아침잠을 자다가 몇 번이나 기습적인 아침 인사를 건네받은 아내는 그때마다 경기라도 일으키듯 소스라치게 놀라 창문을 닫으러 달려갔고, 얼마 전부터는 아예 5시40분에 알람까지 맞춰놓은 뒤 몽유병 환자 같은 모습으로 거실 베란다 창문을 닫으러 출동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한때 화제가 됐던 아파트 실내 흡연 관련 주민간 날선 공방 대자보


그런데 문제는 아랫층만이 아니라 윗층에도 웬수 하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온한 아침시간을 아랫층 깡패 이웃사촌이 망쳐놓는다면 안온해야 할 저녁시간은 윗층 웬수 같은 이웃사촌이 망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내 조용하다가 밤 10시만 넘으면 갑자기 시끄러워지는 윗층 웬수의 층간소음 유발은 벌써 몇 개월째 우리 가족을 괴롭히고 있는 중이다.


거실 바닥을 발망치로 쿵쿵 내리찍는 소리 정도고작해야 윗층 사람들이 집에 돌아왔다는 신호에 불과했다. 밤 10~11시에 "드르륵 득득득" 하고 요란하게 진공청소기를 돌리며 대청소를 하는 걸 시작으로 집에서 볼링공이라도 던지나 싶게 한 번씩 묵직하게 쾅쾅 대곤 하는데, 이런 상황이 새벽 1~2시까지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도대체 집 안에서 그 시간에 무슨 짓들을 하면 그런 소리가 나는지 너무 궁금해서 쫓아 올라가보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우리 가족은 처음엔 하루이틀 걸러 한 번씩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윗층에 주의 좀 줘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윗층 웬수는 자기들은 시끄럽게 한 적이 없다며 억울하다고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였다. 요즘 아파트들이 벽식 구조다 보니 다른 층에서 시끄럽게 한 소리가 울려서 그런 모양이라고 나름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변명을 내놓기도 했다. 아마 다른 데서도 많이 해본 솜씨인 듯 한데, 참 희안한 건 그렇게 우리집과 아파트 관리사무소, 윗층 3자 간 인터폰 대화가 오가고 있노라면 한동안은 거짓말처럼 층간소음이 딱 멈춘다는 거였다.


더 웃겼던 건 윗층 웬수 이웃사촌의 태도였다. 층간소음 문제로 이렇게 인터폰이 수 차례 오가던 중 한 번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윗층 안방 마님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정말 TV에서나 볼 법한 코미디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지하주차장 쪽에서 올라오던 문제의 윗층 안방 마님께서 1층서 올라타는 우리 부부를 보자마자 갑자기 얼굴을 바닥에 쳐박을듯 푹 숙이더니만 있지도 않은 신발끈을 매만지기 시작한 거다.


동네 산책을 다녀오던 길에 무심코 엘리베이터를 탄 우리 부부는 처음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통해 몇 번 인터폰이 오가긴 했지만, 서로 얼굴은 몰랐던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윗층 안방 마님은 바로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었고, 얼굴 마주볼 낯이 없었던지 갑자기 있지도 않은 신발끈을 찾은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 부부 역시 앞서 눌려져 있던 윗층 버튼에 눈길이 미쳤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신발끈 같으니라구...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옛날엔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다는 전설이 있더만 요즘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는 또 한 번 엘리베이터에서 윗층 안방 마님을 마주쳤으니 말이다. 이번엔 우리가 지하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었고, 윗층 안방 마님이 1층에서 타는 상황이었는데, 우리를 알아본 듯 그녀는 잠시 주춤하더니만 자기네 층이 아닌 그 윗층 버튼을 눌렀다. 앞서 잽싸게 얼굴을 피하는 바람에 비록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 잠시간의 어색한 주춤거림을 통해 우린 그녀가 윗층 안방 마님이란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부끄러운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 결과 차마 이웃 얼굴 마주볼 낯도 없어 있지도 않은 신발끈을 고쳐매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스스로 자초하면서까지 왜 그렇게 사나 싶어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났다. 부지런한 걸로는 모자라 성실하기까지 해서 매일 아침마다 시간 맞춰 담배 연기를 이웃들에게 꾸준하게 선물하는 아랫층 이웃 역시 답답하고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진 못하더라도 가족 앞에, 이웃 앞에 얼굴 들고 살 정도로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20년 넘게 아파트란 공간에서 살아본 경험자로서 내가 배우고 느낀 건 벽과 마루를 함께 사용하는 공용 공간 특성상 살다 보면 굳이 애 쓰지 않아도 이웃들에게 이런저런 폐 끼칠 일이 정말 많다는 거다. 그런데 뭐하러 남들이 싫어하고 마다하는 걸 굳이 행하느라 애까지 꽁꽁 써가며 이웃에게 폐를 끼치려 드는가? 개중엔 건설사들이 비용 아끼느라 부실시공을 해서 그런 건데 왜 주민끼리 드잡이질을 해야 하냐며 우린 죄없다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담의 죄는 아담이, 하와의 죄는 하와가 져야 하는 법이다. 사악한 뱀에게 죄를 묻는 건 별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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