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사진장이 Aug 17. 2021

남의 역사 '삼국지'보단 우리 '고구려'가 읽혀지길

소소잡썰(小笑雜說)


어린 시절 나는 "무릇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삼국지를 열 번은 읽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삼국지를 많이 읽으면 그 안에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하고 많은 책들 중에 왜 하필 삼국지일까 의아하긴 했지만,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어릴 땐 그게 진리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 10년여에 걸쳐 무려 열 번 이상 삼국지를 읽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이 번역한 10권짜리 책이었는데, 오십 몇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한 책을 그렇게 반복해 읽은 건 그게 처음이었다. 심지어 좀 나이가 든 뒤엔 소설가 이문열 버전 삼국지까지 섭렵했으니 이 책에 관한한 나름 읽을만큼 읽었다고 생각한다.


십상시의 난으로 시작해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 도원결의를 하고, 희대의 책략가 제갈공명을 만나 조조, 손권 등과 천하를 삼분하는 과정을 그린 삼국지는 확실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이었다. 원소의 대군과 맞서 싸우던 조조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동안 적과 내통해 온 신하들의 명단을 보고 받고는 "한창 전쟁 중일땐 나조차 목숨이 위태롭다 느꼈었는데 그들이야 오죽했겠느냐. 불문에 붙여라"고 깔깔대며 통 크게 용서하는 장면, 조조의 백만대군 속을 필마단기로 달리며 목숨을 걸고 자기 아들을 구해온 장수 조자룡을 보고는 유비가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못난 자식놈 하나 때문에 상장군을 잃을뻔 했구나" 하고 분노하며 갓난 아기를 바닥에 내팽개치는 장면 등은 내 가슴을 퍽이나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화살 10만 개를 만들어 갖고 오라는 오나라 대장군 주유의 차도살인지계에 맞서 안개 낀 날 허수아비로 가득 채운 빈 배를 몰고 가 조조 군대를 감쪽같이 속임으로써 수십 만 개의 화살을 공으로 얻어온 묘계, 자신이 죽은 걸 알면 기미를 눈치챈 사마의 군대가 반드시 맹렬히 추격해 오리란 걸 예측하고서는 가짜 인형을 준비해 적군을 혼비백산해 도망치도록 만든 제갈공명의 신산 등은 볼 때마다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인재를 중시하고 귀하게 대하는 용인술이라든가, 적의 약한 곳을 나의 강점으로 공략해 쉽게 승리를 얻어내는 병법 등을 보며 얻는 게 적지는 않았지만, 거기 등장하는 지명이나 사람들, 생활풍습까지도 결국 낯설디 낯설기만 한 다른 나라 얘기였다. 위나라가 득세하든 촉나라가 흥성하든, 혹은 오나라가 쇠락하건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역사, 남의 나라 무용담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엔 왜 삼국지 같은 책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나라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당당한 주권국가로 존재했었고, 그 중 고구려는 북방정책을 적극 펼쳐 만주벌판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었다는 기록까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왜 우린 남의 나라 삼국지나 읽고 있어야 하는가 안타까워서다. 과거엔 식자들이 소설 나부랭이 같은 걸 무시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대하소설 류의 숨이 긴 소설을 써낼 수 있는 역량있는 작가들도 여럿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던 중 김진명 작가가 쓴 소설 '고구려'를 만났다. 평소 김진명 작가가 쓴 책을 거의 빼놓지 않고 읽올 만큼 애독자라 소설 고구려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책들만 주로 써오던 작가의 글이라 처음엔 좀 낯설단 느낌도 들었지만, 김진명 작가 특유의 흡인력 있는 필력과 탄탄한 구성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책 속으로 푹 빠져들 수 있었다.


미천왕 을불이 왕자임에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 신산고초를 겪다가 어렵게 왕으로 등극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고국원왕 사유와 소수림왕 구부, 고국양왕 이련에 이르기까지 네 임금의 이야기를 7권의 책으로 엮어낸 고구려 1부는 우리가 학교 교육에서는 배우지 못한 고구려의 위대한 역사에 대한 상상력을 한껏 부풀려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걸핏하면 50만 대군, 100만 대군이 등장하는 중국 삼국지에 비하면 스케일이 좀 작다 느낄 순 있겠지만, 우리 땅 우리 민족의 역사여서 더 관심이 가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동안 중국의 변방 소국  내지 속국 정도로 여겨져 온 우리나라가 사실은 한때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만큼 강하고 힘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인구수로 보나 군대 숫자로 보나 상대가 안 된다는게 그동안 우리가 알아온 잘못된 상식인데, 그런 통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는 역사적 사실을 소설 고구려는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렇게 중국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과 기백을 갖고 있었던 시점이란 게 고구려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군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도 전이란 사실이 더 흥미를 자아냈다. 7권을 끝으로 1부를 마무리한 김진명 작가의 소설 고구려는 그 말미에 매우 의미심장한 복선을 깔아놓고 있다. 남들보다 최소 몇 수 앞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을 바탕으로 제갈공명 뺨치는 지략가로 그려지고 있는 소수림왕 구부가 왕위를 비롯한 모든 걸 내려놓고 또 어디론가 사라지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직한 동생 고국양왕 이련에겐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고, 동생의 아들이자 미래의 광개토대왕이 될 자신의 조카에겐 '담덕'이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선물한 뒤 어디론가 표표히 사라진 소수림왕. 앞서 문무신료의 한결같은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동생 이련에게 왕권 권한대행을 맡긴 채 중국 문명의 근간인 '공자'와의 보이지 않는 물밑 전쟁을 하러 몇 년씩이나 잠행과 기행을 했던 소수림왕이니만큼 조카 광개토대왕을 위해서도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총 3권으로 쓰여질 예정인 2부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선대로부터 반목과 갈등을 이어온 숙적 백제를 공격해 한강 이북을 빼앗고, 북으로 만주와 요동까지 정벌해 나가는 과정이 그려질 건데,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진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작품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된다. 아득한 역사 속에 어렴풋한 옛 국가로만 존재해 온 우리 고구려를 새롭게 다시 발견해 나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구글에서 '대고구려'를 검색하면 나오는 고구려 전성기의 우리나라 지도들


이어져 나올 2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좀 차별화해서 '대(大)고구려'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론 우리 아이들이  "무릇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삼국지를 열 번은 읽어야 한다"는 말 대신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고구려를 열 번은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 신토불이라는 말마따나 우리 몸엔 우리 음식이 좋듯이 역사소설도 기왕이면 우리 게 우리 몸과 마음에 더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상은 내돈내산 난생 처음 써보는 어설픈 내 멋대로 독후감이었음을 명백히 밝힌다. 모처럼 책을 일곱 권이나 읽었는데 뭔가 하나 기념할만한 걸 남겨보고 싶어서 좀 무리를 했다 ^^

작가의 이전글 가장 먼저 비를 맞고, 가장 세찬 바람을 견뎌내는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