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관객모독' 말뚝이가 그립다

아주 특별한 사진 한 장 #13

by 글짓는 사진장이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작품이 있었다. ‘연기와 대사는 전적으로 배우가 다 하는 거고, 관객은 그저 구경만 하는 존재’라는 전통적인 연극 관념을 통쾌하게 깨부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극작가 페터 한트케가 만든 희곡 작품을 원작으로 1978년 극단 초우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선보인 이 연극은 한동안 장안의 큰 화제가 됐었다. 비싼 돈 내고 연극공연을 찾아주신 귀한 관객에게 막무가내 욕을 해대는 건 기본이요, 하다하다 나중엔 물이나 처먹으라며 물세례까지 퍼붓는 파격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연 초창기엔 관객들이 깜짝 놀라거나 황당해 하는 사례가 많았다. 개중엔 비싼 돈 내고 연극 보러 왔는데 욕지거리나 해댄다며 분노해서는 의자를 집어 던지는 관객들도 있었다고 한다.


‘연극판에 빠졌다간 밥 굶기 딱 좋다’는 말이 빼박 진리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연극 저변인구도 희소하다 싶을 정도로 적었고, 자연 자칭 문화인이라 자부하는 일부 ‘점잖고 고상한 사람들’ 정도가 공연장 주변을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욕을 하고 물까지 끼얹었으니 성질 좀 괄괄한 관객이라도 든 날이면 분노해 의자를 집어 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해프닝이 생겨날 정도로 ‘관객모독’이란 연극은 내용과 형식 모두 파격적 혹은 파괴적이었다. 오래지 않아 이런 파격 혹은 파괴는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이끌었고, 관객과 소통하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 등장했다는 소문 덕분에 인기몰이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이런 ‘관객모독’ 류의 연극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전혀 파격적이지도, 파괴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극작가 페터 한트케나 극단 초우보다 몇 백 년 앞서 이를 무대 위에 구현한 'K-관객모독'이 있기 때문이다.


이쯤 얘기하면 '아하!' 하고 이미 눈치를 챈 분들도 있을 거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우리 고유의 전통연희 '마당극'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K-관객모독’의 시조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봉산탈춤과 강령탈춤, 양주별산대놀이 등 각종 전통 마당극에 등장하는 말뚝이라는 존재다. 주로 지체 높은 양반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인데,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청개구리 같은 성격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주 못된 하인놈이다. 상전인 양반에게 사사건건 말대꾸를 일삼거나 골탕을 먹이려 들기 일쑤고, 중인환시리에 '돌려까기 신공'으로 양반을 능멸하고 욕하는 간 큰 하인놈이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가 엄존하는 조선시대에 천 것 하인인 말뚝이가 마당 한 가운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대놓고 양반을 욕한 것은 ‘관객모독’ 정도가 아니라 ‘지배계급 모독’이었고 ‘시대모독’이었다. 페터 한트케가 깨부순 건 고작해야 무대와 객석 사이 경계 정도였지만, 우리나라 마당극은 처음부터 그런 경계도 없었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신분제 시대까지 들이받은 파격과 파괴 그 자체였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그런 유구한 전통을 가진 우리의 마당극이 점점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거다. 객석과의 구분없이 평활한 마당에서 관객들과 어우러져 펼쳐지던 공연 형식이 점점 무대 위로 고립되고, 시대 상황에 맞춘 거칠 것 없는 패러디와 욕설로 관객들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던 공연 내용은 전통계승이라는 미명 아래 그 옛날 대사를 반복해 읊조리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이래 놓으니 ‘관객모독’ 같은 연극은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실험극이라 주목받고 호평을 받는 판에, 그보다 몇 백 년 앞서 더 큰 파격과 파괴를 그 안에 녹여낸 우리의 마당극은 옛 것, 낡은 것이라 외면 받으며 사람들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찍으며 내가 남다른 감흥을 느꼈던 이유는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다. 가로 세로 몇 미터짜리 정해진 무대 없이 길바닥 위에서 관객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져 공연을 펼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마당극은 원래 이런 모습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런 공연들을 좀 더 자주, 많이 보고 싶다. 대중들과 함께, 시대와 함께 숨쉬며 못된 양반놈들을 욕하고 잘못된 세상을 들이받던 우리의 말뚝이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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