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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KI Aug 06. 2017

[책] 강남의 탄생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일상을 단순화하고 몇 가지의 일에만 집중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우선순위 최상단에는 '일(직업)' 이 놓일 때가 많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거나 여가시간을 보낼 때에도 가능한 한 현재의 일(직업)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편이라는 말.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업을 할 때에는 경영,전략,재무,HR 관련 책들만 열심히 봤다. 의도했다기 보다는 다른 책에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인데 그러다 현재의 회사(투자)로 옮기고 나서는 경영전략 책들은 전혀 관심이 없어졌다. 최근 읽는 책들은 대부분 경제를 포함한 사회과학책들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하는 책들. 


그러나 대학교 때 이후로 변하지 않는 '관심분야' 도 있다. 신간코너에서 발견하면 한번은 들여다 보게 되는 분야의 책들인데 도시, 건축 그리고 미디어가 바로 그 분야이다. 도시가, 건축이, 그리고 미디어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양상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흥미로웠고 또한 정치,경제,사회적 상황과 이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자주 버리는 편이라 책장에 꽂힌 책이 이백 권 남짓인데 그 중에 '서울' 관련한 책이 다섯 권이나 되니 지분율이 상당하다.


이번에 읽은 강남의탄생(한종수&강희용지음/미지북스 출판) 도 신간코너에서 보자마자 집어들었고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3년 넘게 청담동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거리와 건물들이 자주 등장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던 듯.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그리고 현재도 부모님께서 거주하고 계시는 광장동은 항상 송파/잠실 권역과 같은 취급을 받고 싶어 했다. 집 값도 다르지 않고 거주자들의 소득/학력수준도 비슷하다는 이야기들을 동네어른들이 하곤 했고, 나도 은연중에 송파/잠실을 내가 사는 광장동과 동일선상에 놓았던(혹은 놓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광장동은 강동쪽의 목동'이라는 쓸데없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90년 대부터 강남은 항상 1인자였다. 2인자인 송파/잠실지구가 강남구와 서초구로 위시되는 '강남'에 포함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2인자인 목동이 본인들을 '강서쪽의 강남' 이라고 부르며 강남을 선망했다. 결국 나를 포함한 광장동아이들은 '1인자 강남'을 동일선상에 놓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니 2인자에 슬쩍 묻어가서 '광장동도 뭐 2.5인자 쯤은 되는거 아니겠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사실 광장동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동네고, 워커힐이 있는 곳 혹은 천호동 맞은편이라고 해야만 '아...' 하고 그나마 인지하는 곳인데 참으로 쓸데없고 광장동 동네아이들에게만 중요한 '2.5인자' 포지션이었다. 



강남이 현재와 같은 지위를 갖기 시작한 것이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다. 이 때 강남에서 태어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 젊은이들은 부모들이 이룩한 '신흥귀족'의 지위를 태어날 때부터 갖고 사는 세대다. 가끔 신사,청담,반포 등 강남에서 태어나고 자란 주변인들을 만나면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아직 생각이 정리되어있진 않으니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정리해보기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단연 '두도시이야기' 이고,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들이 일상을 어떻게 바꾸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관심사가 내가 지금 하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내가 벤처캐피탈리스트라는 나의 직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부터는 발췌문이고, 조금 많지만 관심있으신 분들은 주욱 읽어보시면 지금의 강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제3한강교(한남대교), 강남 고속터미널은 자동차 시대와 함께 강남 시대를 연 삼총사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영동, 즉 오늘날 강남 쪽에도 한강 다리가 만들어진다. 바로 제3 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이다.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걸립된 이 다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강북'과 '강남'을 이어주는 첫 번째 다리였다.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보다 먼저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도 이어져 그 출발점이 되었다."


"'자동차 강남'을 만든 세 번째 주인공이자 막내인 고속터미널. 서울시와 정부는 외곽에 짓기로 하고 반포에 터를 잡았다. 당시 반포는 완전히 허허벌판이었는데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었던 손정목은 회고록에서 '미국이나 일본의 주요 도시들 역시 터미널이 기차역과 인접해 있고 서울도 그런 식으로 도시 근접성을 강화하기 위해 터미널을 서울역 근처에 두려 했지만 '분산 지상주의자'들에 의해 실패했다' 고 밝히고 있다. 경부선 터미널은 거대한 우주선을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외관에다 4층까지 버스가 올라가는 놀라운 시설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식당, 은행, 목욕탕, 약국, 상점 등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작은 수직도시' 였다..(중략)..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모두가 집중된 결과 반포 일대에 엄청난 교통 혼잡이 발생해 서울시는 부랴부랴 서초동 일대에 남부터미널을 만들어 시외버스터미널로 삼았다."


"한강을 서울의 중심 생활권으로 만들기 위한 한강 개발이 1967년부터 시작 되었다. 한강의 수량과 수위를 일정하게 위지하기 위해 마침내 소양강댐이 1973년에 완공되어 범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 가장 큰 혜택을 본 지역이 강남이었다. 어쩌면 소양감댐이야말로 강남을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현대건설은 1969년 압구정 일대에 대한 매립면허를 허가받았다. 물론 '건설 공사용 각종 콘크리트 제품 공장 건설을 위한 대지 조성 및 강변도로 설치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졌고, 매립지는 곧 택지로 변경되어 그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세워졌다. 공유수면 매립 공사는 봉이 김선달이 환생해도 놀랄 정도로 무조건 남는 장사였다. 건설 비수기인 12월부터 4월까지 노는 중장비와 노동력을 이용해 첫해에는 우선 제방만 쌓아 두고, 다음 해 비수기에 모래를 퍼부어 공유수면을 매립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지 위에 자신들이 직접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거나 아니면 땅을 그냥 국영 기업이나 정부 투자기관에 일괄 매각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강변은 강변도로에 이어 아파트 숲이 되어갔다..(중략)..반포,서초동 일대는 강변도로보다 지대가 낮은 저지대였다. 심한 홍수가 나면 저지대는 꼼짝없이 물이 차게 된다. 그래서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양택식은 저지대 지역은 모두 3층 이상으로 집을 짓게 하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최악의 경우 주민들이 3층 이상으로 대피하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침수되는 지역까지 전부 아파트 지구로 지정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리하여 유례없이 아파트만 지을 수 있는 '아파트 지구'가 강남에서 공식 탄생했다."


"강남 이주를 촉진한 또 하나의 요인은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붕괴였다. 유사시 한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문제는 서울 시민들의 머리 한구석을 차지한 꽤 진지한 걱정거리였다."


"영동지구에는 최초로 근린주구 개념, 즉 일반 주민과 주부, 어린이가 간선도로로 나가지 않고 주거 단지 내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다. 강남은 기본적으로 필지가 컸고 그에 따라 도시 블록을 가로세로 600미터 안팎의 거대한 규모로 만들게 되었다.(뉴욕은 가로 250미터 세로 70미터) 근린주구이론을 만든 미국의 실정과 한국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당시 도시계획가들은 권력이 요구하는 속도전에 부응하면서 '든든한' 서구의 이론을 끌어다가 풍미라고는 없는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과천은 광명시와 함께 경기도 내에서 서울 전화번호를 쓰는 유이무삼의 도시이기도 하다."


"신흥 중산층이 서서히 강남에 모이고, 삼저 호황과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자 1981년 삼원가든을 시작으로 커다란 가든형 갈빗집이 논현동과 압구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더 확산되는 가운데 교외에 더 좋은 갈빗집들이 생겨났고, 강남의 땅값이 더욱 치솟으면서 대형 갈빗집들은 삼원가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1980년대 초 '영동문화'의 한 단면 이었다..(중략)..1979년 10월, 소공동 롯데백화점의 개장과 함께 롯데리아가 등장했다..(중략)..칼로리가 높은 '정크푸드'로 인식된 미국식 패스트푸드는 한물가기 시작했다. 1992년 TGI프라이데이스가 양재동에 1호점을 오픈하면서 패밀리 레스토랑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치동제 인터넷 강의는 곳 '전국화'되었지만 이것만이 대한민국 사교육의 '성지' 대치동을 만든 요인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 외환 위기였다. 이때를 계기로 조직이 개인을 책임진다는 평생직장개념이 무너졌고, 이를 목도하며 자라나는 세대들은 믿을 것은 자기 자신, 즉 '스펙'뿐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90년 33.2%에서 2000년 68%로 두 배 이상 올라갔다..(중략)..대치동 학원들이 강세를 보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수능의 등장이다. 1993년 이전의 학력고사는 암기 위주의 시험이었지만 수능은 야자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시험이었다"


"뱅뱅브랜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계기는 1982년의 교복자율화 조치와 마케팅에 있었다."


"1974년 초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은 '3핵 도시론'에 매료되어 있었다. 3핵 도시론이란 기존의 서울 도심을 첫 번째 핵으로, 여의도와 영등포 산업 지대를 두 번째 핵으로 삼고, 세 번째 핵으로 강남을 건설한다는 도시계획안이었다..(중략)..구의에서 잠실로 가는 최단거리 노선이 있었음에도 구태여 강변과 잠실나루를 거쳐 구의로 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덧붙여진 이 두역은 주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배려'한 조치였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유치가 한국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잠실종합운동장의 건설을 비롯하여 한강종합개발과 올림픽대로 건설, 코엑스와 예술의전당 건설, 아시아공원과 올림픽공원 조성, 두 대회를 위한 선수촌아파트 건설, 목동 신시가지 건설, 지하철 3&4호선의 조기 개통, 가락동 도매시장 건설, 가락지구 구획정리 사업 등이다."


"사실 잠실,송파 일대가 강남으로 합류할 수 있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아시아선수촌과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였다."


"제2롯데월드는 건물 자체보다도 123층짜리 빌딩이 성남 서울비행장에 이착륙하는 항공기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문민정부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거부되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무슨 이유인지 허가가 내려졌다."


"1990년 초 개포동 영구임대아파트는 주차장이 택시들로 가득 찬, 택시기사 가족들의 집단거주지였다..(중략).. 최저 소득계층에게 주택을 공급하겠다며 건설된 영구임대아파트가 실제로는 그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1988년에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현안은 주택문제였다. 노태우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주택 200만호 건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참고로 당시 서울의 주택 수는 160만 호였고 전국을 다 합쳐도 700만 호에 불과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업이었다. 그 중 90만 호를 수도권에 건설할 예정이었는데, 바로 분당,일산,중동,산본,평촌과 같은 제1기 신도시가 중심이 되었다."


"우리나라 아파트 건설에서 가장 큰 문제는 습식 건축을 지나치게 선호하는 데에 있다. 습식은 시공이 간편하고 숙련공이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장점 덕분에 습식 건축이 대세가 되고 그 덕분에 많은 아파트를 지어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건물의 내구성 저하와 새집 증후군이라는 두 가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서초동 일대에 고만고만한 건물밖에 없는 이유는 고도 제한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을 굽어보지 못하게 해 놓은 조치이다. 비슷한 예는 여의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서초동과 같은 이유로 서여의도가 동여의도에 비해 건물이 훨씬 낮다..(중략)..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정보를 추가하면 사랑의교회 건축을 계기로 고도 제한이 풀렸다고 한다."


"앞으로 강남의 업무 중심은 강남역 쪽에서 삼성동 쪽으로 더 기울 확률이 높다. 우선 넓은 당을 가진 한국전력이 광주로 이사를 가고 현대자동차가 고층 빌딩을 짓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감정원과 시립병원까지 이사를 가게 되면 그 공간은 더 넓어지고 잠실종합운동장의 유휴 공간까지 연계해 개발되면 시너지 효과는 커질 것이다."


"오늘날 지하철 3호선 양재역의 동남쪽에 있는 말죽거리지역은 당시 아예 복덕방 촌을 이뤘다..(중략)..1963~1979년 16년간 학동의 땅값은 무려 1천333배, 압구정동은 875배, 신사동의 경우 1천 배가 올랐다. 같은 기간 신당동과 후암동의 땅값은 각각 25배 상승하는 데 그쳤다. 물론 강남의 땅값이 그 전에 워낙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정말 놀라운 지가 상승이었다. 사람들은 이 같은 강남 땅값 폭등을 일러 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렀다. 특히 강남 지역에는 옛 왕실 재산이 많았는데 이를 불하하면서 평당 90~120원에 내주는 특혜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한 이가 훗날 영동백화점의 주인이 되는 김형목과 삼호의 창업자가 되는 조봉구였다."


"강남의 부동산은 왜 그렇게 강력할까? 첫째, 강남 부동산 소유자들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강남에는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거주한다. 1급 이상 공직자의 20~20%가 강남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중략)..이런 사레들은 이른바 '강남 카르텔'이 부동산 정책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참여정부 때 만들어진 종합부동산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거의 무력화되었고 물론 이에 앞장선 이들이 강남 지역 국회의원들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을 강타한 신자유주의의 충격 속에 강남 유권자들은 배타적인 경제적 지위를 지키기 위한 '계급 투표'의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삼풍그룹을 인수한 서울시는 보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1999년 삼풍백화점 부지를 2,062억 원에 대상그룹에 넘겼고 대상그룹은 초호화 주상복합인 아크로비스타를 건설하였다. 역사에 새길 만한 대참사가 벌어진 곳이라면 의당 추모공원 등 비극을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정상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아직 그런 문화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근대화 이후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중략)..우리나라에도 아파트가 맨션이 된 적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대형 아파트의 시조격인 이촌동의 한강맨션이 그것이다. 한강맨션이 성공하자 렉스, 리바뷰, 점보 등 외래어가 붙은 아파트가 이촌동에 경쟁적으로 등장했고 서울시는 1976년 아파트 이름에 외래어 사용을 금지했다. 그래서 이후 아파트들은 현대나 우성 같은 건설사명을 아파트 이름에 가져다 쓰거나 진달래, 개나리, 진주 등 고유어나 한자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조세희의 기념비적인 작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등장하는 아파트 이름이 무지개인데 이 역시 이런 분위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재건축 바람이 부는 2000년 초반부터 완전히 사라졌고 '래미안'으로 대표되는 아파트의 브랜드화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신사동 가로수길이 특이해지기 시작한 해는 1982년이었다. 1978년 인사동에 문을 연 예화랑은 인사동이 번잡해지고 땅값이 오르자 한적한 이곳으로 이사했고 그러면서 서서히 화랑,갤러리 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남 개발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주 고객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 초에 에스모드,서울모드라는 두 의상 디자인 학원이 이곳에 문을 열면서 패션학도와 디자이너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신사동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그림수요가 사라졌고 화랑과 액자가게가 비운 자리는 의류와 액세서리를 파는 디자이너숍들이 메웠다. 또 영화관련 회사와 조직들이 가로수길과 그 주위에 많이 들어왔다. 그 덕분에 신사동은 시나브로 '강남의 충무로'로 변모했다."


"대부분의 민간투자사업의 경우 교통수요를 과다하게 예측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운영수입보장(MRG)'에 의해 민간사업자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맥쿼리와 같은 민간 투자 사업자는 가급적 예측 통행량을 과다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중략)..그런데 지하철 9호선의 경우에는 오히려 예측 통행량이 과소하게 계산된 특이한 사례다..(중략)..지하철 9호선은 민간 투자 사업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바탕으로 맥쿼리가 소유 지배 구조에서 손을 떼고, 그 자리를 시중 은행들이 대거 참여해 메웠다. 1천억 원 규모의 시민펀드가 하루 만에 동이 나면서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1990년에 수립된 최초의 서울도시기본계획은 2000년을 목표연도로 삼았다. 새로운 천 년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서울시는 '통일 한국의 수도' '태평양 시대의 중추도시' 등 다소 거창한 구호로 서울의 미래상을 설정했다. 아울러 서울특별시라는 행정경계를 넘어 수도권 전체를 아우르는 '광역대도시권' 개념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강남북 균형 발전' 과 '다핵 도시로의 재편'을 본격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강남의 특수한 권력지위를 형성시킨 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순시장이 주도한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의 미래상은 '인간 중심의 살고 싶은 도시'였다. 지방자치제가 본격 시행됨으로써 주민 중심의 도시기본계획이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상암, 용산, 뚝섬 등 강북 지역의 대규모 개발이 구상되었고 최근에야 입주를 시작한 강서 지역의 마곡 지구도 이 때 구상되었다. 기존 도시기본계획이 '도심-부도심-지구중심' 의 3단계 관리 체계였다면 2011서울도시기본계획은 '지역중심' 개념을 도입하여 '1도심-4부도심-11지역중심-54지구중심'으로 이를 재편했다. 도시 내 공간의 위계질서가 보다 고도화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2006년에 이명박 서울시장 주도로 '2020서울도시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세계도시 서울을 미래상으로 제시했다. 당시에도 강남의 지위는 여전히 영동을 중심으로 한 부도심이었다..(중략)..강남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주도한 '2030서울플랜'에 이르러 부도심 딱지를 떼고 도심으로 전격 승격한다. 기존의 1도심 체제를 3도심 체재로 재편한 2030서울플랜은 기존의 1도심 체제를 3도심 체제로 재편한다. 구도심을 역사 문화 중심지인 한양도성 도심으로 정하고, 여의도는 국제 금융 중심 도심, 강남은 국제 업무 중심 도심으로 정하게 된다."


"1964년부터 여의도,영등포,회현 등 서울 시내 각지의 무허가 주택이 철거되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은 쓰레기차에 실려 이곳 목동에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목동은 비가 오면 안양천을 건널 수가 없어서 배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의 저지대였기 때문에 오히려 도심에서 더 먼 화곡동이 먼저 개발되었다..(중략)..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준비하던 전두환 정권은 여객기를 타고 오는 외국인들이 김포공항에 내리기 전에 하늘에서 보이는 서울의 첫 모습, 즉 양천벌에 널려 있는 판자촌을 방관할 수 없었다. 3년간에 걸친 목동 철거민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3년 서울시는 강서구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136만 평의 신시가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가 개발 지역의 땅을 전량 사들이는 '토지 공영 개발'방식을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다..(중략)..서민형 아파트를 짓겠다는 초기의 계획을 서울시가 번복하고 내쫓길 위기에 몰리자 주민들은 목동성당을 거점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3년 간의 투쟁을 거쳐 가옥주들은 처음으로 무허가 주택의 재산권을 인정받았고, 세입자들은 10평짜리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져렴한 이자의 융자를 약속받았다."


"목동은 여의도와 가까워서인지 방송과 언론기관들의 유치에는 성공했다. 방송위원회와 방송진흥원이 21층짜리 회관을 지어 입주했고, 종로구 연견동에 있던 기독교방송도 사옥을 지어 이사했다. 기독교방송 사옥은 현대 하이페리온이 등장하기 전까지 목동의 랜드마크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목동은 작은 강남이라는 별명답게 성공한 단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김수근과 서울시가 처음에 의도했던 경인-서울 남서부 중심축 기능을 하는 신도시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주거환경 불균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화두였다. 서울시는 낙후된 주택 밀집 지역과 구도심을 대대적으로 재개발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바로 2002년 이명박시장 재임기의 뉴타운 사업이다. 그러나 뉴타운의 문제점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와 더불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짧은 시기에 지나치게 넓고 많은 지역을 지구 지정 하다 보니 '생활권 계획'이 아니라 '광역정비사업' 으로 변질되었고 기반 시설 설치에 부담이 공공이 아닌 사업시행자(주민들)의 부담으로 전가되어 사업에 악영향을 미쳤다. 결론적으로 말해 뉴타운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강남의 성공은 우리나라 도시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 등 광역시는 물론이고 인구 10만 명도 안 되는 소도시도 모두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것처럼 신도심을 개발해 시청,법원,방송국, 터미널 등 알짜시설을 옮겨 놓았다. 구도심에는 옮길 수 없는 기차역과 전통시장이 남았고 고도 경주와, 성곽이 있는 전주나 공주, 진주, 호수를 끼고 있는 춘천, 몇몇 항구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방도시들은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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