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약간 '멜랑콜리 박' 모드.
(1)
아주 대단한 2020년 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이번 '올해의 마지막 글'은 스스로 하는 심리치료같은 느낌이니 '얘 오늘 멜랑콜리모드구나' 하고 읽어주면 좋겠다 ㅋㅋ (근데 나 2019년 마지막글에서 꽤나 2020년을 잘 예상한 것 같아..특히 아래 문단..자화자찬..ㅋㅋ)
(2)
지치고 슬프고 화날 때가 꽤 있었다. 나의 어떤 성향은 일하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되는데, 그러나 그 성향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스트레스를 만드는 촉매제이기도 해서 그 성향이 주는 혜택 만큼 내 안의 화가 자꾸 쌓인다. '다들 힘들어서 그래, 나는 정신력이 강하잖아, 남들보다 버퍼Buffer가 더 있다고, 그리고 이런 감정 약간 사치데쓰.' 라고 계속 스스로 되뇌이는 한 해였다.
(3)
'지옥, 그것은 타인' 굉장히 좋아하고 항상 생각하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되고, 아래와 같은 의미.
비슷한 맥락으로 좋아하는 문구는 김국환의 '타타타' 가사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로 시작하는 가사 전체가, 내가 원하는 삶의 태도라서 초딩 때 듣고 감명받아서 지금까지 내 맘 속 인생곡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음음 어 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4) 예민벌레
결국 언제나 나를 제일 못살게 구는 건 나다. 아무도 그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기준점을 설정하고서는 까탈스럽게 군다. 내가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하는, 내 마음 속 애완곤충이 있는데 이름이 '예민벌레'다. 내 안에서 뭔가 까탈스러움이 드러나려고 하면 '예민벌레 또 나왔네' 라거나 '아, 진짜 예민벌레!' 하고 생각하며 한숨쉬는 용도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와 어떻게 소통하는지 궁금하다.
(5)
아무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타인이 나를 이해해주리라 기대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슬픔은 나눈다고 절대 반이 되지 않고 오히려 괜히 상대방이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 각자의 슬픔을 안고 사는데 내 것이 마치 더 큰 것인양 상대방에게 징징대는 건 좀 이기적인 거라고. (다른 이의 고민을 듣기 싫다는 뜻은 아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긴 한데.. 그런데 올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조금씩 내가 타인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또 기대고 싶어 하는 걸 느꼈다. 이게 긍정적인 변화인지 아니면 나약해진 것이고 그러면 안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6)
마음을 다스리러(!) 강릉으로 도망가 한 달을 보내다 왔다. 저녁약속들이 사라진 것 만으로도 시간이 꽤나 생겨서 영화도 보러 가고 혼자 와인바에 가서 책도 읽고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운전연습도 열심히 하면서 충만하게 침묵하는 시간을 보냈다. 젤 성가신 나랑 많이 놀아줬다. '한 달 다녀오겠습니다' 했을 때 흔쾌히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는 팀이 있어서 감사하다 언제나.
(7)
2020년은 할 수 있는 걸 했던 한 해다. '곧 괜찮아질거야, 조금만 버티면..' 라고 굳게 믿다 보면 계속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어 지치게 되고 오히려 더 빠르게 소진될 것이기에 'COVID19가 금방 끝날거야' 라는 희망을 갖지 않은 상태로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올해 중순 즈음부터는 생각했고 실천했다.
(8)
뒤돌아보면 꽤 이룬 것들이 많았던 한 해이기도 하다. 가장 잘 한 일은 운전면허를 딴 것.
(9)
2020년 시작할 때 세웠던 목표 중 하나가 앞으로 10년 간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뭐가 되었건 찾아보자는 거였는데, 아마도 찾은 거 같아서 2021년엔 두 가지의 그 것들을 좀 더 해볼 생각. 아예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기 보다는 어릴 때 툭툭 건드렸던, 그러나 결코 잘하지는 않았던 것들을 꾸준히 다시 해볼 것.
(10)
어짜피 전례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기존의 질서와 규칙을 아예 무시할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더 기대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지금 한국의 20대들이 그 어떤 시절의 20대들보다 제일 멋지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을 향한 목소리와 창작물 그 모든 것에 부러움을 넘어서 매우 존경한다. 게다가 한국의 위상이 꽤나 높아진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쓸데없는 국가콤플렉스도 없는 편이고.. 더 많은 힘을 그들에게 실어준다면 진짜 발칙하고 놀라운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리하게 암체처럼 그들 옆에 딱 붙어 있기로 결심했다 ㅎㅎ 2021년 목표 중 하나는 더 많은 20대분들을 만나고 친하게 지내는 것.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많이 소개받고 또 연락도 하고 그래야겠다.
(11)
똑똑하고 자기 일에 열심인 여성이 밝고 배려심까지 있을 때 감격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것은 굉장히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이거든. 아직까지는 쉽지 않은 사회이기에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그녀들이 참고 인내해온,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것들은 참으로 많을 것이므로.
(12)
온라인이,모바일이,디지털화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제 모두가 느끼게 되었다. '어이쿠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었군' 하고. 새로운 IT서비스나 기술에 대해 다양한 규제와 견제들이 이미 존재했던 한국과 달리 미국이나 중국은 좀 더 느슨한 규제정책을 펼쳤었는데 이제는 조금 다른 양상이 될 것 같다. 바짝 엎드리기만 하는게 능사는 아닐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소통하는 법도 배워야 할 때인 것 같다.
(13)
나는 우리 팀 동료들이 참 좋다. 서로 기본적인 신뢰가 있기에 쓸데없는 데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되어서 이 작은 팀으로도 많은 일들을 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모두가 나처럼 느끼진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계속 듣고 바꿔야 한다. 이제는 사람이 조금 많아져서 그 노력을 해야 한다.
(14)
적정한 수준의 멜랑콜리 정서를 매우 사랑하는데 겨울은 그 정서를 품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솔직히 이 글 내내 매우 멜랑콜리했다). 게다가 2020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의 마지막날인 내일은 뭘 할까 하다가 죽음에 대해서 읽고 생각하기로 했다. 연말연시는 그러기에 딱 좋은 때니까.
(15)
작년 마지막글의 맺음말도 그러했는데, 올해도 친구들에게 제일 고맙다. 사랑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