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르타주로 쓴 AI 시대, 그리고 AI 시대의 작가에 대해서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뇌피셜이긴 하고, '먼저온미래' 책의 리뷰라기 보다는 책의 주변 텍스트(시대적환경 등를 중심으로 적은 일종의 메타리뷰다. 그래서 뭐 스포도 없다)
나는 장강명의 신작을 단순히 '알파고 이후 바둑, 그리고 AI 이야기'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은 “AI 시대에 작가는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장강명의 실험과 대담한 승부수처럼 느껴졌다.
AI가 글을 더 잘 쓰는 시대, 작가라는 직업은 언제나 사라질 직종의 최상단에 언급된다. 국경을 넘고, 피로를 모르며, 쉬지 않고 생산해내는 AI 덕분에 앞으로 책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많이 쏟아질 것이다. 번역은 더 이상 장벽이 아니며,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 실시간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지금, 각국의 로컬 작가들은 시작부터 전 세계 작가들과 경쟁해야 한다. 쏟아지는 책들 중에 ‘무엇을 읽을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서 무명 작가에게 남는 기회는 점점 희박해진다. 결국 살아남는 건 이름만으로도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이미 확고한 입지를 가진 상위 1%의 작가들뿐일 것이다. 그리고 장강명은 한국에서 이미 이름을 얻은 작가지만, 글로벌 무대에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그러나 AI 시대는 변방의 작가들에게 역설적인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장강명의 표현을 빌리자면, AI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고 있다. 중심과 주변의 격차가 줄어들며, 한국처럼 문학 시장의 변두리에 있는 작가도 세계 독자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장강명은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작가도 출판사도 '인플루언서'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이 작품을 통해 글로벌에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려는 시도는 유명세를 위한 야망이 아니라, 작가로 살아남기 위한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읽어야 한다. '장강명의 글로벌로 유명한 작가되기 프로젝트‘ 나에게 이 책은 그의 그 담대한 실험으로 읽혔다.
오웰의 길, 장강명의 길
장강명은 늘 조지 오웰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해왔다.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오웰을 롤모델로 삼았음을 밝혀왔고, 자신이 오웰의 맥락과 정신을 계승하고 싶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나는 장강명이 항상 오웰의 행보를 자신만의 역사 속에서 재현하고 싶어 했다고 본다. 오웰이 격변의 시대를 글감 삼아 점점 목소리를 키워갔듯이, 장강명에게 AI라는 천운처럼 찾아온 기회로 느껴졌을 것이다. 로컬 작가가 국경의 장벽 없이 전 세계 독자와 연결될 수 있는 드문 환경. '먼저온 미래'는 바로 그 타이밍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더 멀리까지 확장해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글로벌 독자에게 이름을 알리는 작가’가 되는 실험에 앞서, 이 책은 먼저 한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왜 전 세계 독자들이, 한국 작가가 쓴 AI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 답은, 이 이야기가 한국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독자들이 납득하는 데 달려 있다. 운좋게도 한국에겐 그 이유가 될만한 소재가 있었으니, AI 대중화의 분수령이 된 사건, 바로 ‘이세돌 vs 알파고’의 격돌이 한국에서 벌어졌던 것.
보통이라면 한국 작가가 쓴 AI 책은 글로벌에서 노관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 AI가 ‘알파고’이고, 그 상대가 ‘이세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AI의 결정적 순간이 한국에서 일어났기에, 한국 작가가 이 사건을 출발점 삼아 AI 시대를 이야기하는 건 맥락상 자연스럽고, 문화적으로도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기에 '장강명의 글로벌 실험' 의 소재는 '이세돌vs알파고' 격돌이어야 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오늘날 한국에서 AI가 유독 뜨거운 관심사가 된 배경에는 이세돌–알파고 대국의 충격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샘 알트만이나 마크 저커버그의 뉴스가 매일같이 보도되고, 인구 대비 OpenAI 사용자 수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라는 사실도, 그때 국민 대부분이 겪은 강렬한 기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르포르타주 형식이어야만 했다, AI가 쓸 수 없는 글이기에.
르포르타주란, 작가가 현장을 직접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문학적 기법을 활용해 서사적으로 풀어낸 논픽션 형식의 글쓰기다
장강명이 택한 형식은 단순한 해설서나 에세이가 아니라 르포르타주였다. 그의 실험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르포르타주여야만 했을 것이다. AI는 이미 설명적 글쓰기와 창작적 글쓰기를 능숙히 해낸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며 관찰하고 현장에서 느낀 공기를 글로 옮기는 것은 AI가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르포르타주는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글쓰기다. 따라서 장강명은 AI가 따라올 수 없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나라는 작가가 왜 여전히 필요한가”를 증명할 수 있는 무기로서.
이 책은 확실히 국경 밖을 향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하지만 상상에만 기대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책 속에는 분명 ‘비(非)한국인’ 독자를 의식한 흔적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이를테면 “한국의 출판사인 문학동네”, “한국의 SF 작가 듀나” 같은 표현들. 장강명의 글을 읽는 독자라면 문학동네가 출판사라는 걸 모를 리 없는데다, 굳이 중간중간 ‘한국의’라는 설명을 덧붙인 대목들이 나온다. 분명 국내 독자만을 상정한 문장은 아니다. 이왕 뇌피셜을 굴린 김에 좀 더 밀어붙여보자면, 장강명은 아마도 2025년 노벨문학상 발표 이전, 그러니까 한강 작가를 필두로 한국 문학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아직 식지 않은 이 시점에 해외 판권 계약까지 염두에 두고 이 책을 기획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내가 출판계의 룰을 모르면서 혼자 상상해보는 것이긴 하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본문 자체보다도 ‘장강명의 글로벌 실험’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기분에 더 크게 흥분했다. 이 영민한 작가가 이번 계기를 통해 정말로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거 아닐까? 책이 출간되기만 하면 모두가 읽는 글로벌 저자가 비문학분야에서도 이제 한국에서 나올 때도 된 것 아닌가? 그런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난 지금, 그 기대는 큰 아쉬움으로 끝났다. 이 책은 알파고가 바둑이라는 스포츠와 산업을 근본부터 뒤흔든 지난 10년의 이야기와, AI가 출판/문학계에 가져올 담론과 변화들을 병치해 전개하는 1~8장, 그리고 갑작스럽게 장르가 전환되며 사회적 질문과 우려를 던지는 9~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케이팝처럼 한 책에 여러 장르가 들어가 있어 갸우뚱 그러나 새로운데?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새로움’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실망으로 이어졌다. 강렬하게 시작했던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 특히 9장과 10장은 힘이 빠졌고, 논지 역시 흐릿해졌다. 저자가 후반부의 메시지를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최소한 초반부 절반 정도의 분량을 할애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구성으로는, 이 담대한 시도가 성공적인 실험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것이 작가의 역량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에필로그에 드러난 그의 개인적 사정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거라 본다. 9장과 10장은, 아내가 병실에 있을 때 써 내려간 글이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책을 완성해낸 자체가 놀랍다. 언젠가 그의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을 때(가능한 이 글의 유효기한이 여전히 활활 타오르며 유지되는 동안에), 책이 다시 개정되어 후반부가 보강되기를 바란다. 오웰을 닮고자 했던 작가가 AI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진짜 실험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아내, 그믐 김새섬 대표님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