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나는 비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편한 비행을 위한 의상을 제대로 챙겨 입고 야무지게 챙긴 캐리어를 돌돌돌 끌고 나간 뒤 공항을 향하는 교통수단 안에서 느끼는 설렘도 좋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특유의 사람들의 목적의식 가득한 활기찬 공기도 좋다. 물건을 넣었다 뺐다 정신없는 검색대 짐검사 후 자동출입국 시스템 덕분에 한결 수월해진 출국 수속을 마친 뒤 출국장에 들어서면 (인천공항의 경우)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면세품 쇼핑의 향연이 기다리고 있다. 보딩에 앞서 라운지에서 공짜 음식과 차 한잔을 즐기며 느긋하게 즐기는 여유는 또 어떠한가.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곧 있을 비행을 위한 마음을 다지는 준비 단계일 뿐. 보딩시간에 게이트로 들어가고 비행기에 탑승한 뒤 딱히 필요는 없지만 없으면 또 허전할 것 같은 승무원의 자리 안내를 받아 짐정리를 하고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는 그 순간부터 본격적인 비행 여정 시작이다.
과거 재직 시절 아버지는 해외 출장을 정말 많이 다니셨다. 얼마나 많이 다니셨냐면 여권에 도장 찍을 공간이 바닥나서 새로 발급받은 여권까지 스테이플러로 2권을 찍어서 두툼하게 들고 다니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비행을 자주 다니면 몸도 고되고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힘든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진심이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아버지는 비행이 싫지 않다고 하셨다. 이유는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되어 온전히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라고. 아버지의 경우 독서를 워낙 좋아하셨기에 업무를 보는 시간 외에 책 읽기로 대부분의 비행시간을 보내셨으리라고 추측된다. 과거 무료한 비행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특히나 예전에는 기내 상영영화를 영화관처럼 프로젝터로 벽에 쏴주는 시스템이었는데 선택권 따위는 사치고 볼 테면 보고 말 테면 마라는 식이었다. 그 마저도 화질과 밝기가 썩 좋지 않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 어쩌다 영화를 놓쳐서 중간부터 본다거나 깜빡 잠이 든다거나 화장실에 가기라도 하면 그냥 놓치는 거다. 옆에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를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상상 또는 짐작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내 페이스에 맞출 수 있는 경제적인 엔터테인먼트 수단은 음악 감상과 독서뿐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탑승했던 에미레이트의 항공기에서 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는데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전 좌석 등받이 뒤에 개인 화면이 달려있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화면이었지만 어찌 됐건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할 수 있었고 나의 페이스에 맞춰서 잠시 멈췄다가 재생할 수도 있었다. 혁신적이었다. 본격적인 기내 1인 엔터테인먼트 시대의 도래를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공기 시스템은 업그레이드를 거듭하여 화면이 더 커졌고 화질은 더 좋아졌고 상영물 종류도 많아졌으며 터치 스크린으로 조작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싱가포르 항공의 Kris Entertainment의 경우 과장을 조금 보태서 거의 넷플릭스를 들여놓은 수준이다. 내게 비행의 가장 큰 매력은 좋은 영화를 "발견"하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딴 때 같으면 볼 생각도 안 하거나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인데 탐색을 하다가 눈에 띄어서 우연히 보게 된 좋은 영화들이 많다. 남편의 직장 동료는 그래서 싱가포르 항공을 탈 때 유럽 영화 카테고리를 유심히 본다고 한다. 대체로 마이너한 취향의 영화들이라 그 분야에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평소 찾을 생각도 안 하는데 주어진 선택권 안에서 탐색을 하다 보니 발견하게 되는 좋은 영화들이 많다고. 생각해 보면 항공사에서 돈 주고 상영 라이선스를 구매할 텐데 아무 영화나 고르진 않을 테니 나름 큐레이션을 거친 목록이라고 봐도 될까.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완벽히 차단된 상태에서는 중간에 나를 찾는 톡이 오지도 않고 중간중간 스마트폰을 보느라 주의가 산만해질 일이 없기 때문에 온전히 영화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영화 감상뿐 아니라 독서를 포함한 다른 여가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로서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은 고지에 이르렀으며 이보다 더 좋아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고지를 넘어서는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 수단이 등장하였으니 바로 기내 와이파이 서비스다.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3차 기내 엔터테인먼트 혁명이다. 1차는 공동 엔터테인먼트 시대, 2차는 개인 엔터테인먼트 시대, 3차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다. 다만 나는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2차에서 멈추기를 바랐다. 외부 세계와의 강제적인 단절과 그로 인해 나만의 활동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비행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고 그 묘미가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물론 와이파이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강제적인 차단과 선택에 의한 차단은 조금 다르다. 전자는 모두가 기내 안에서 각자의 활동에 집중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선택한 승객들이 한데 뒤섞여서 분위기가 번잡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지상에서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보기 갑갑한데 공중에서도 그걸 봐야 한다니. 그리고 선택권이 존재한다는 상황 자체가 나의 욕구를 억누르게 만드는 느낌이다. 스마트폰만 보는 사람들이 갑갑하다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에 길들여진 현대인이라 멀리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기보다 의식적인 노력을 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작년에 현재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직항 편에 탑승하게 되었는데 이는 싱가포르와 뉴욕을 오가는 싱가포르 항공의 여정으로 거리 상으로는 장장 9585마일이며 시간 상으로는 편도로 18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루 24시간 중 3/4를 차지하고 영화가 편당 2시간이라면 쉬지 않고 끊임없이 시청해도 9편을 볼 수 있으며 타고 난 수면복(睡眠福)이 있는 승객의 경우 10시간을 연달아 깊은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도 8시간을 넘게 더 가야 하는 엄청난 여정인 것이다. 뉴욕에 갈 때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옆자리 승객의 부재로 편하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와이파이 없이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주로 기내 영화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이북리더기에 책도 여러 권 넣어갔기에 영상물 시청이 지겨워지면 독서로 간간이 환기를 시킬 수 있었으며 잠이 오면 자고 기내식이 나오면 먹는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뉴욕이었다. 그런데 모든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는 여정이 조금 더 걱정이었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라지만 어찌 됐건 타국에서 돌아다니느라 심신이 피로해진 상태였고 첫 번째 비행은 멋 모르고 탄다고 쳐도 두 번째는 이미 한번 경험을 해 본 상태라 이 짓을 또 해야 하나 싶어 자연스럽게 막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귀국 편에는 18시간 동안 나에게 상당한 불편을 끼친 승객까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 탑승에 앞서 나의 막막함을 카카오톡으로 친구들에게 표현하니 그중 한 명이 넌지시 제안을 던진다.
"18시간 비행이면 인터넷 사서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ㅠㅠ"
하도 기내 와이파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아예 옵션 자체를 잊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싫다 싫다 외치던 기내 와이파이 이용권을 결국 구입하였고 워낙 속도가 느려서 동영상 시청까지는 안 되더라도 SNS 접속과 간단한 온라인 커뮤니티 서핑, 메신저를 통한 기내 상황 실시간 공유로 그나마 긴 비행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무료하게 보낼 수는 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있음으로써 긴 비행시간을 견디기가 조금 더 수월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기내 와이파이 서비스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덜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웬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기내 와이파이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쪽이다. 몇 시간이건 한나절이건 강제적으로라도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너무 소중하다.
최근 방콕과 루앙프라방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그중 방콕과 루앙프라방을 왕복하는 여정은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아예 설치되어 있지 않은 기본형 항공기였으며 방콕에서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싱가포르항공은 내 좌석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사용이 불가능했다. 단거리 비행이라 사실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크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그 덕에 나는 핸드폰에 담아 간 오디오북을 비행기 안에서 완독해왔으며 와이파이의 부재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잡음이 없었기에 온전히 귀로 들어오는 콘텐츠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는 이미 온라인 세계가 던지는 온갖 노이즈와 자극에 노출되어 있으며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오프라인 세계에서 실재하는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들이 허다하다. 공중에 떠 있는 단 몇 시간만이라도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편이 더 값지지 않을까.
기내 와이파이는 세상과 단절될 기회의 박탈일까 세상과 연결될 선택권의 확장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