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울렁증에 대하여

문자 주시겠어요?

by 박양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가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분명히 내가 먼저 걸었고 전화가 연결이 되어야만 해결점에 다가설 수 있는 사안인데도 동시에 아무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동시에 올라온다.


"달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네 상담사 ㅇㅇㅇ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를 걸기에 앞서 준비해 놓은 마음속 대본을 따라 일단 전화를 건 목적과 문의사항을 차근차근 읊어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통화 전 예상했던 시나리오와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면서 외워뒀던 대사들의 정렬이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 늘어놓았다가 혹여나 이런 나를 모자라 보인다고 괄시할까 봐 고객이라면 누구나 던질 법한 묵직한 건의사항 몇 마디 전달하고 수화기를 놓고 나면 도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정리가 되지를 않는다. 심지어 하려다가 빠트린 중요한 이야기가 끊고 나서야 기억나는 경우도 부지기수. 대화를 곰곰이 곱씹어보니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더 적합한 대사들도 하나둘씩 떠오르지만 이미 늦었다.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고 같은 상담사를 찾아서 방금 귀하와 나눈 그 대화에 제가 첨언하고 싶은 바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통화 당시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한 나 자신을 자책하며 허공에 하이킥을 여러 번 날린다. 과장된 바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음성 통화를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공감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우스갯소리로 요즘 MZ 세대는 음성 통화를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여긴다고 한다. '전화 공포증' 혹은 '전화 울렁증'이라는 말도 있다. MZ 세대라고 하면 흔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정도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회적 정의를 찾아보면 엄연히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그 기준으로 따지자면 나도 어엿한 MZ세대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지 영어로 'phone anxiety'라는 표현도 있으며 이 phone anxiety를 유머 소재로 삼은 만화도 있다.


세계 종말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저 캐릭터의 전화 통화 하나뿐인데 차마 수화기를 들지 못해서 지구가 망해버리는 내용이다.


전화 울렁증을 소재로 삼은 개그 채널의 동영상은 또 어떠한가.


https://www.youtube.com/watch?v=zCcaAQjlgsg


전화 울렁증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표면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음성 통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가 나의 의사나 생각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말로 전달하는 것이 서툴었던 내게 음성 통화는 모든 면에서 스트레스였다. 차라리 앞에 사람을 두고 하는 대화라면 상대방의 표정이 보이고 외부 환경에 잠깐 눈을 돌릴 수도 있고 딱히 할 말이 없으면 조금은 불편해도 침묵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상대도 있다. 그런데 통화라는 것은 일단 수화기를 들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표정이나 반응이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로 오직 음성에만 의지하여 소통을 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안정한 느낌이 있다. 상대의 숨소리, 말투, 발음, 높낮이, 볼륨... 수화기 너머로 감지되는 요소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인다. 가끔 대화가 잘 풀리지 않아 통화를 이어가는 일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질 때 최후의 보루로 던지는 한마디가 있다.


"통화 후에 문자/이메일 한번 보내주시겠어요?"


문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소통 수단은 음성 통화가 일으키는 모든 불안 요소에서 나를 해방시켜 준다. 말은 내뱉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문자는 내가 엔터키를 치는 그 순간 직전까지 수정의 기회가 있다. 심지어 이제는 메신저 앱에 따라 문자를 보낸 후에도 삭제를 하거나 수정을 할 수 있는 기능까지 생겼다. 문자 형태의 의사소통은 미래의 하이킥감에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필터요 보호막이다. 나영석의 한 유튜브 영상에서 방송작가 이우정이 과거에 영어 실력을 속이고 무역 회사에 입사했는데 당시 외국인과 통화를 해야 할 때마다 매번 "Fax please."라며 전화를 끊었다던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남편은 나의 이러한 고충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나 문의 사항이나 일처리에 있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두 가지는 사안의 빠른 해결과 일이 해결될 때까지 명확하게 다시 찾을 수 있는 책임자이기 때문에 연락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일단 수화기부터 든다. 직접 사람을 만나 대면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결혼 생활은 서로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나도 자연스럽게 훈련 과정을 거치다 보니 예전에 비하면 제법 전화 통화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경험치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사람을 대할 때의 긴장감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아줌마가 되어가는 하나의 성장과정이라고 봐도 될까. 그러나 아직도 식당 예약을 해야 할 때 온라인으로 예약이 가능한 지부터 확인해 보고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약을 걸게 되는 것은 역시 아직도 음성을 이용한 소통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MZ여서일 것이다. 젊은 MZ들이여, 전화 통화가 어렵다고 자괴감 들어하지 말지어다. 늙은 MZ는 아직도 전화 통화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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