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 그 온기에 대하여

다정함도 무기(武器)

by 박양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조하고 단조로운 일상 속에 예고 없이 나에게 닿는 온기가 있다. 각자가 속해 있는 세계 속 시간과 목적에 쫓겨 움직이기 바쁜 현대인들 사이에서 나 또한 무감각하게 바쁜 도시 생활의 흐름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예고 없이 나에게 와닿는 온기.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은 당황하면서도 이내 그 따뜻함에 곧 날카로워져 있었던 신경들이 노곤하게 느슨해져 마음이 너그러워져 버린다. 다정함의 힘이다. 그래서 다정함도 무기다.


최근 비행기를 타고 있던 중 텅 빈 표정으로 기내 상영 영화 목록을 살펴보다 보니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유명한 영화 평론가들의 호평을 스쳐 지나간 기억이 있으나 나와 같은 일반인들 사이에는 악평만 자자하게 들었던지라 볼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던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을 정도로 화제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 순수한 호기심에 틀어봤는데 웬걸, 당황스럽게도 나의 인생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온갖 기하학적이고 기괴한 요소들로 감을 잡을 수 없이 정신없이 흘러가는데 그 와중에도 강력한 한방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을 관객들에게 꽂아 넣는다. 그중 하나가 "다정함"의 힘에 대한 것이다.



내용이나 감상평은 이미 다른 곳에 차고 넘치게 올라와 있으니 생략.


다정함은 대체로 사소하고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소소해서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이나 각자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삶 속에서 지쳐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는 힘이 있다. 여행을 가고, 사고 싶은 물건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다정함이 삶을 살 만하게 해주는 원리와는 조금 다르다. 즉각적인 쾌락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아 시간이 지나도 조용히 미소 짓게 만드는 특유의 뭉근한 온기가 있다.


태국의 한 쇼핑몰에 갔을 때 피팅룸이 어디 있냐고 묻자 이 쪽으로 오라며 나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이끌던 점원 여사님의 손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를 기억한다. 백미밥만 찾는 남편이 흑미밥만 제공되는 식당에 갔을 때 공깃밥을 생략하자 안타까워하시다가 옆 식당에서 백미밥을 빌려오신 제주도 한 식당 사장님의 따뜻한 배려심을 기억한다. 라오스의 폭포 근처에서 쉬고 있는 나와 남편에게 갑자기 먹을 것을 권하던 소풍 중인 현지인 가족의 순박한 미소를 기억한다. 여수의 한 호텔에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그 짧은 시간 안에 우리 손에 두 알의 왕딸기를 쥐어주고 내린 한 커플의 무심한 친절을 기억한다. 대학생 때 엄마와 체코슬로바키아 여행을 하다가 타던 밤기차 안에서 우리가 내려야 할 곳을 기억해 놨다가 챙겨주고 내린 같은 칸 젊은 청년의 사려 깊은 세심함을 기억한다.


따지고 보면 다 별 것 아니다. 하지만 그 행위에 따른 여운은 이렇듯 오랫동안 잔상으로 차곡차곡 남아 각박한 현실 속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쉽지 않지만 나도 남에게 다정함을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갖출 수 있도록 마음 훈련이 필요하겠다. 쓰지 않는 무기는 녹이 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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