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함이 영어로...?
작년에 한 베이킹 스튜디오 단기 아르바이트로 통역을 나갔었다. 한국인 초빙 강사 선생님이 이곳 스튜디오에 오셔서 3일 동안 한국어로 베이킹 강연을 하는 일정이었고 나는 그분의 강연 내용과 직원 및 학생들과의 의사소통 통역을 담당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인 선생님은 첫날부터 이곳 스튜디오의 진행 방식에 꽤나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우선 새로운 환경과 언어, 문화에서 오는 생소함이 우선이겠고 어딜 가든 한국만큼 시설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갖춘 나라가 없다. 또한 이 스튜디오는 수업의 기본틀은 갖추되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유연성 있게 진행하는 방식이라 (이곳 수강생들도 과정의 정확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한국에서의 기준에 맞춰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불안정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첫째 날 강연을 어찌어찌 잘 마치고 난 후 현지 스튜디오 오너인 A에게 전달할 피드백이 있다며 통역을 부탁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데는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해외에 있는 수강생들을 직접 만나고 자신이 긴 시간 동안 공 들여 쌓아 온 기술을 나누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나는 A가 내 레시피와 계량을 가볍게 생각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의 계량과 배합은 오랜 시간 연구를 한 끝에 특정한 도구와 틀에 맞도록 나온 것이다. 그런데 A는 최대한 비슷한 도구들을 제공해 준 뒤 최종 모양이 조금 다르더라도 그대로 진행해도 괜찮다는 식이니 나는 오랜 시간 이 분야를 걸어온 전문가로서 제대로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서운해."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전하려는 듯 A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반복한다. "서.운.해."
거기서 통역이 턱 막혔다.
서운하다가 영어로 뭐지? Angry? 아니야 그건 너무 공격적이야. Disappointed?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모멸감을 줄 수 있잖아. Sad? 음.. 슬프다는 건 아니잖아. Pissed off? 이건 그냥 강연 쫑 내자는 얘기죠.
결국 적합한 말이 없어서 "She feels the class could have been better organised."라고 풀어서 의역했었던 것 같다.
온라인 국어사전에서 "서운하다"를 검색하니 "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이 있다."라고 나온다. 이렇게 보니 더욱 미궁에 빠진다. "아쉽다"와 "섭섭하다"는 감정도 영어로 표현하기 애매한 건 매한가지인 것이다. 아마도 이는 설정된 인간관계가 서로 응당 지켜야 할 의무를 결정짓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것일 테다. 그래도 우리가 친구인데, 그래도 네가 자식인데, 그래도 우리가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이것만 봐도 서운함, 아쉬움, 섭섭함의 감정이 다 느껴지지 않는가? 맺어진 관계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권 사회에서는 개인의 위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서운함"과 맥락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영단어가 없는 것 같다. 그래봤자 "I‘m hurt."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직역하면 나 상처받았다는 뜻이라 이 표현을 남발하면 말하는 사람이 별 것 아닌 일에 툭하면 바스러지는 쿠크다스 심장의 소유자 같아진다. 언어의 형태가 그 나라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언어 분석의 관점은 접어 두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결말을 말하자면 결국에는 3일 동안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해가 풀리고 마음속 앙금이 서서히 사그라들어서 마지막 날에는 유쾌한 수다와 허심탄회한 대화, 그리고 감동의 눈물이 공존하는 저녁 식사로 마무리를 잘 지었다. 초반에 쏟아져 나온 불만들이 무색하게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언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며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어딜 가나 다들 비슷한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