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이름
“주말에 시간 되세요?”
도현이 물었다.
우리는 여섯 번째 만남이었다. 호텔 라운지 바가 아니라, 한강변 카페에서.
“주말이요?”
나는 놀랐다.
지금까지 우리는 평일 저녁에만 만났다. 주말은 다른 세계였다. 도현에게는 가족이 있는 시간.
“네. 토요일 오전.”
도현이 말했다.
“괜찮으세요?”
“네.”
나는 대답했다.
“어디서 만날까요?”
“문자 보낼게요. 아침 여덟 시.”
도현은 그렇게만 말했다.
토요일 아침.
도현이 문자를 보냈다.
“압구정로데오 3번 출구. 10분 후.”
나는 서둘러 준비하고 나갔다.
압구정로데오 3번 출구. 도현의 차가 서 있었다.
제네시스90. 나는 조수석에 탔다.
“안녕하세요.”
“응.”
도현은 짧게 대답하고 바로 출발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가평.”
“가평이요?”
“보여주고 싶은 데가 있어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고속도로.
도현은 운전에 집중했다.
라디오도 틀지 않았다. 그냥 조용했다.
가끔 도현이 내 손을 잡았다.
말없이.
기어를 바꿀 때는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나는 창밖을 봤다.
서울이 멀어졌다.
“부인한테는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골프.”
도현이 짧게 대답했다.
“혼자요?”
“응. 나는 원래 혼자 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죄책감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가평.
산 속 작은 마을.
도현이 차를 세웠다.
“내려.”
우리는 내렸다.
공기가 차가웠다. 서울보다 훨씬.
“추워요.”
내가 말했다.
“조금만 걸으면 돼.”
도현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빠른 걸음.
나는 따라갔다.
오솔길.
나무들 사이로 좁은 길.
도현은 익숙하게 걸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예전에 왔었어. 오래전.”
도현은 내 손을 꽉 잡았다.
“혼자.”
그가 덧붙였다.
“외로웠어.”
나는 그를 봤다. 도현은 앞을 보며 걸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너랑 왔잖아.”
도현이 나를 봤다.
“외롭지 않아.”
그리고,
눈.
어제 내렸나 보다. 얇게 쌓여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예쁘다.”
내가 말했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걸었다.
작은 개울.
개울가에 돌들이 있었다. 크고 평평한 돌들. 눈이 쌓여 있었다.
“여기.”
도현이 말했다.
그는 돌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돌멩이. 날카로운.
“이름 새기는 거야.”
“뭐요?”
“우리 이름.”
도현은 눈을 치웠다. 평평한 돌이 드러났다.
그리고 새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확실하게.
긁는 소리.
김도현
그리고 옆에,
♡
“네 차례.”
도현이 돌멩이를 내밀었다.
명령하듯이.
나는 받았다.
손이 떨렸다.
이은서
하트 옆에 새겼다.
김도현 ♡ 이은서
도현은 그 글씨를 봤다.
“좋네.”
짧게 말했다.
도현이 눈을 다시 모았다.
우리가 새긴 이름 위에.
하얀 눈으로 덮었다.
“왜요?”
“아무도 보면 안 되니까.”
도현이 말했다.
“우리만 아는 거야. 우리 둘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게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만 아는 비밀.
도현이 눈 위에 다시 뭔가를 그렸다.
손가락으로.
큰 하트.
하트 안에,
D ♡ E
“이건 괜찮아. 눈은 녹으니까.”
도현이 말했다.
“사진 찍어도 돼요?”
내가 물었다.
“응.”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눈 위의 하트를 찍었다.
D ♡ E
도현은 내 핸드폰을 봤다.
“예쁘네.”
그가 말했다.
“근데 나한테는 보내지 마.”
“네?”
“문자로. 사진으로. 흔적 남으면 안 돼.”
도현은 나를 봤다.
“미안해. 조심해야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말했다.
“기도해.”
“기도요?”
“응. 여기 이름 새기면, 기도하는 거야.”
도현이 말했다.
“서로를 위해서.”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너는 나를 위해서, 나는 너를 위해서.”
도현은 눈을 감았다.
나도 눈을 감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도현의 손이 따뜻했다.
나는 기도했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를.
이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이 사람이… 나를 선택하기를.
눈을 떴다.
도현도 눈을 떴다.
우리는 서로를 봤다.
“뭐 빌었어?”
도현이 물었다.
“비밀이에요.”
도현이 웃었다.
“나도 비밀.”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도현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차로 돌아왔다.
도현이 말했다.
“2박 예약했어.”
“네?”
나는 놀라서 그를 봤다.
“내일 일요일까지. 괜찮아?”
“괜찮아요. 하지만…”
“부인한테는 골프 모임 1박이라고 했어.”
도현은 앞을 보며 말했다.
“원래 그렇게 할 때도 있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박.
도현과 나, 둘이서.
펜션이었다.
산 속 작은 펜션.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도현이 체크인했다. 나는 차 안에서 기다렸다.
“올라가자.”
도현이 돌아와서 말했다.
우리는 2층 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 넓은 방. 큰 침대. 창밖으로 보이는 산.
“여기.”
도현이 짐을 내려놓았다.
나도 내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녁 먹고 싶어?”
도현이 물었다.
“아니요. 배 안 고파요.”
“나도.”
도현은 재킷을 벗었다.
셔츠를 벗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는 그를 봤다.
“뭐해. 너도 벗어.”
도현이 말했다.
“지금요?”
“응. 편하게 있자.”
우리는 벗었다.
옷을.
전부.
도현이 먼저 침대에 누웠다.
“이리 와.”
나도 누웠다.
도현 옆에.
우리는 섹스했다.
격렬하게.
도현은 거칠었다. 배려하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끝나고,
우리는 빨갛게 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땀이 식었다.
도현이 나를 안았다.
“물 마실래?”
“응.”
도현은 일어나 물을 가져왔다.
나는 마셨다.
도현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누웠다.
우리는 이불도 덮지 않았다.
그냥 빨갛게 벗고 누워 있었다.
난방이 잘 돼서 춥지 않았다.
“편하네.”
도현이 말했다.
“네.”
나도 대답했다.
도현은 천장을 봤다.
“너 처음 봤을 때 생각나?”
“네.”
“회의실에서.”
“스물두 도.”
내가 말했다.
도현이 웃었다.
“맞아. 스물두 도.”
그가 나를 봤다.
“그때 너 예뻤어.”
“지금은요?”
“지금도.”
도현은 내 손을 잡았다.
“지금이 더 예뻐.”
우리는 이야기했다.
밤새도록.
과거 이야기. 어린 시절. 가족. 꿈.
도현은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엄격했어. 무서웠어.”
“지금은요?”
“돌아가셨어. 10년 전에.”
“미안해요.”
“괜찮아. 오히려… 편해졌어.”
도현이 말했다.
“나쁜 아들이지.”
“아니에요.”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해해요.”
도현은 나를 봤다.
“너는?”
“아버지는 좋아요. 어머니가 좀… 강해요.”
“어떻게?”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다 정해놓으세요. 변호사도 어머니가 원해서.”
“후회해?”
“가끔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뭐 하고 싶었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른 삶.”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도현 씨도요?”
“응. 가끔 생각해. 이게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뭐요?”
“회사. 가족. 책임. 다 내려놓고.”
도현이 말했다.
“그냥 너랑 어디 멀리 가서 살면 어떨까.”
나는 그를 봤다.
“진심이에요?”
“지금은.”
도현이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은 진심이야.”
시간이 흘렀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밤이 됐다.
우리는 여전히 누워서 이야기했다.
도현은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했다.
나는 대학 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웃었다. 울었다.
“배고파?”
도현이 물었다.
“조금.”
“룸서비스 시킬까?”
“네.”
도현은 일어나 전화했다.
알몸으로.
나는 그를 봤다.
예순둘 살의 몸.
젊지 않았다. 군살이 있었다. 피부가 처졌다.
하지만 나는 그게 좋았다.
진짜였으니까.
음식이 왔다.
우리는 옷을 입고 받았다.
가운만.
그리고 다시 벗었다.
침대에서 먹었다.
샌드위치, 샐러드, 와인.
“맛있어?”
도현이 물었다.
“네.”
나는 대답했다.
“도현 씨는요?”
“응. 좋아.”
도현은 와인을 마셨다.
“너랑 있으니까 다 맛있어.”
나는 웃었다.
“치즈 같은 소리.”
“맞아. 치즈 같지.”
도현도 웃었다.
“근데 진심이야.”
우리는 다시 누웠다.
음식을 다 치우고.
와인만 남기고.
도현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서야.”
“네.”
“이거 언제 해봤어?”
“뭐요?”
“이렇게 밤새 누워서 이야기하는 거.”
나는 생각했다.
“스물… 스물한 살?”
“대학생 때?”
“네. 남자친구랑.”
“그 후로는?”
“없어요.”
나는 말했다.
“한 번도.”
도현은 나를 봤다.
“나도.”
“도현 씨도요?”
“응. 20대 때 이후로 처음이야.”
도현이 말했다.
“이렇게 밤새 누워서 누군가랑 이야기하는 거.”
“부인이랑도요?”
“응. 부인이랑도 안 했어.”
나는 도현을 봤다.
20살 이후 처음.
나도. 도현도.
우리 둘 다.
“은서야.”
“응.”
“나 행복해.”
“저도요.”
“진짜 행복해.”
도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만나서.”
나는 그를 안았다.
“저도요.”
내가 말했다.
“저도 행복해요. 진짜.”
우리는 다시 섹스했다.
이번에는 천천히.
부드럽게.
끝나고,
우리는 또 누워서 이야기했다.
“자고 싶어?”
도현이 물었다.
“아니요. 깨어 있고 싶어요.”
“나도.”
“시간 아까워요.”
“맞아.”
도현이 나를 꽉 안았다.
“시간 아까워.”
새벽이 됐다.
우리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창밖이 조금씩 밝아졌다.
“곧 해 뜰 거야.”
도현이 말했다.
“보고 싶어요.”
“그래. 보자.”
우리는 일어나 창가에 섰다.
여전히 알몸으로.
해가 떴다.
산 너머로.
천천히.
“예쁘다.”
내가 말했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안았다.
뒤에서.
“은서야.”
“네.”
“이 순간 기억할 거야.”
“저도요.”
“평생.”
도현이 말했다.
“평생 기억할 거야.”
나는 생각했다.
20살 이후 처음.
누군가와 밤새 이야기하고.
섹스하고.
또 이야기하고.
해 뜨는 걸 보고.
이게 사랑이구나.
아침이 됐다.
우리는 잠들지 않았다.
밤새.
도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덟 시.
도현은 핸드폰을 봤다.
표정이 굳었다.
“뭐예요?”
내가 물었다.
“집에서.”
도현이 말했다.
“부인이요?”
“응.”
도현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
나는 돌아섰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들렸다.
“응. 골프장이야. 왜?”
“…”
“뭐? 지현이가?”
“…”
“알았어. 지금 갈게.”
도현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를 봤다.
“무슨 일이에요?”
“딸이 갑자기 한국 들어온대. 오늘.”
도현이 말했다.
“미리 말 안 하고.”
“그럼…”
“가봐야 돼.”
도현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빠르게.
나도 옷을 입었다.
우리는 짐을 쌌다.
체크아웃했다.
차에 탔다.
도현은 운전하면서 말했다.
“미안해.”
“괜찮아요.”
“2박 하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어쩔 수 없잖아요.”
도현은 내 손을 잡았다.
“어제… 좋았어.”
“저도요.”
“밤새 안 자고 너랑 이야기한 거.”
“네.”
“처음이야. 그렇게 한 거.”
도현이 말했다.
“아내랑도?”
내가 물었다.
“응. 아내랑도 안 했어.”
도현은 나를 봤다.
“너랑만.”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서울로 돌아왔다.
도현은 압구정로데오역에서 차를 세웠다.
“여기서 내려.”
“네.”
나는 차에서 내렸다.
도현도 잠깐 내렸다.
우리는 차 앞에 섰다.
“은서.”
“네.”
“미안해. 2박 못 해서.”
“괜찮아요.”
“다음에 꼭 할게.”
“네.”
도현은 나를 당겼다.
짧게 안았다.
“어젯밤 잊지 마.”
“안 잊을게요.”
“나도.”
도현은 나를 놓았다.
“조심히 들어가.”
“도현 씨도요.”
도현은 차에 탔다.
창문을 내렸다.
“은서.”
“네?”
“사랑해.”
도현이 말했다.
“저도 사랑해요.”
“알아.”
차가 떠났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봤다.
눈 위의 하트 사진.
D ♡ E
그리고 어젯밤을 생각했다.
빨갛게 벗고 누워서 이야기했던.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도현의 심장 소리를 들었던.
해가 뜨는 걸 함께 봤던.
도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집 들어갔어?”
“네.”
“딸 만나고 왔어.”
“어땠어요?”
“괜찮아. 잘 지내더라.”
“다행이에요.”
“은서야.”
“네.”
“어젯밤 생각나.”
“저도요.”
“너랑 밤새 이야기한 거. 벗고 누워서.”
“네.”
“좋았어. 진짜.”
“저도요.”
“자주 봐. 사진.”
“네.”
“나도 생각할 거니까.”
나는 핸드폰을 봤다.
“저도 생각할게요.”
“알아. 자.”
“도현 씨.”
“응.”
“사랑해요.”
잠시 답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많이.”
나는 핸드폰을 가슴에 안았다.
이게 사랑이구나.
밤새 벗고 누워 이야기하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다정하지 않지만, 확실한.
배려하지 않지만, 진심인.
불가능하지만, 멈출 수 없는.
이게 사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