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표면
집에 들어서면,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다.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거실로 들어간다.
아내 수연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왔어요.”
내가 말한다.
“늦었네요.”
수연이 말한다. 책을 덮으며. 일어나서 나에게 온다.
“저녁은?”
“먹었어요.”
“차라도 드릴까요?”
“괜찮아요. 피곤해서요.”
수연은 내 손을 잡는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요.”
우리는 손을 잡고 침실로 간다.
나는 도현이다.
예순둘. 제약회사 회장. 성공했다고들 말한다.
겉으로 보면 맞다. 회사는 안정적이고, 집은 넓고, 아내는 현명하고, 딸은 유학 중이다.
수연과 나는 사이가 좋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회장님 부부 금슬 좋으시죠.”
“서른 년 넘게 결혼하셨는데 아직도 손잡고 다니시더라고요.”
맞다.
우리는 손을 잡는다. 같은 침대에서 잔다. 커플 잠옷을 입는다.
하지만 관계는 하지 않는다.
리스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5년 전? 7년 전?
어느 날부터,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는 섹스를 하지 않게 됐다.
누가 먼저 거부한 것도 아니다.
그냥 서서히, 필요가 사라졌다.
수연도 나도 나이가 들었다.
육체적 욕망보다는 편안함을 원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손을 잡고 잔다.
같은 침대에서. 커플 잠옷을 입고.
하지만 그뿐이다.
침실로 들어간다.
수연은 옷장에서 잠옷을 꺼낸다. 네이비 블루 커플 잠옷. 실크 소재.
“오늘 세탁했어요. 입으세요.”
수연이 내게 건넨다.
“고마워요.”
나는 옷을 갈아입는다.
수연도 갈아입는다.
우리는 침대에 눕는다.
킹사이즈 침대.
수연은 내 옆에 바짝 붙어 눕는다. 내 팔을 잡는다.
“오늘 힘드셨죠?”
그녀가 묻는다.
“괜찮아요.”
“요즘 미팅이 많으시더라고요.”
“신약 프로젝트 때문에요.”
수연은 내 팔을 쓰다듬는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건강이 제일이에요.”
“알아요.”
우리는 그렇게 누워 있다.
가깝지만, 멀다.
수연과 결혼한 지 32년이 됐다.
연애결혼이었다.
나는 서른, 수연은 스물여덟. 나는 제약회사에 막 입사했고, 수연은 대기업 비서였다. 우리는 선배 소개로 만났다.
수연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예쁘지는 않았지만, 단정했다. 대화는 편했다.
우리는 1년 반 연애했다.
결혼했다.
처음 10년은 좋았다.
우리는 사랑했다. 손을 잡고 다녔다. 키스했다. 섹스했다.
하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수연의 문제였다. 병원에서 그렇게 말했다.
“입양하는 건 어때요?”
내가 제안했다.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섯 살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지현이.
지현을 키우면서, 우리는 부모가 됐다.
부부이기 전에, 부모.
수연은 지현에게 헌신했다. 나는 일했다.
승진했다. 임원이 됐다. 부사장이 됐다. 회장이 됐다.
수연은 지현을 키웠다.
우리는 바빴다.
어느 순간,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보지 않게 됐다.
그냥 동료가 됐다.
같은 목표를 가진. 가정을 유지하는.
지현이 대학에 간 후, 집이 조용해졌다.
수연과 나, 둘만 남았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천천히,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
동료에서, 친구로.
우리는 함께 산책했다. 함께 전시회를 갔다. 함께 여행했다.
손을 잡았다.
하지만 섹스는 하지 않았다.
필요가 없었다.
수연도 나도 그걸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편안했다.
그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자요.”
수연이 말한다.
내 손을 꽉 잡으며.
“잘 자요.”
나도 대답한다.
불을 끈다.
어둠 속에서, 수연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있다.
따뜻하다.
익숙하다.
32년 동안 잡아온 손.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손은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
편안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은서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냥 클라이언트였다.
능력 있는 변호사.
하지만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알았다.
그녀가 나를 남자로 보고 있다는 걸.
나도 그녀를 여자로 보고 있다는 걸.
오랜만이었다.
누군가 나를 ‘도현’으로 보는 게.
회장이 아니라,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로.
수연의 숨소리가 고르다.
잠든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빼낸다.
수연은 잠결에 중얼거리지만 깨지 않는다.
나는 핸드폰을 꺼낸다.
은서에게 문자를 보낸다.
“자요?”
잠시 후 답장이 온다.
“아직이요.”
“저도요.”
“생각해요?”
은서가 묻는다.
“뭘요?”
“우리요.”
나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답장한다.
“네. 계속요.”
“저도요.”
침묵.
그리고 은서가 묻는다.
“무섭지 않으세요?”
“무서워요.”
나는 솔직하게 답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
“왜요?”
나는 생각한다.
왜일까.
수연은 좋은 아내다.
나를 배려하고, 챙기고, 함께 있어준다.
우리는 사이가 좋다.
싸우지 않는다. 서로를 존중한다.
하지만,
수연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우리는 동료다. 친구다.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외롭다.
32년을 함께 살았지만,
나는 외롭다.
“당신이 좋으니까요.”
나는 답장한다.
처음으로 “당신”이라고 썼다.
은서는 한참 답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메시지가 왔다.
“저도요.”
나는 핸드폰을 가슴에 안았다.
옆에서 수연의 숨소리가 들린다.
고르고 조용한.
나는 그녀를 본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얼굴.
32년을 함께한.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수연을 배신하고 있다는 걸.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배신하고 있다는 걸.
나는 조용히 일어난다.
서재로 간다.
책상에 앉는다.
창밖을 본다.
밤의 서울. 불빛들.
나는 예순둘이다.
성공했다. 안정적이다. 존경받는다.
완벽한 아내가 있다.
**하지만 나는 서른넷 살 여자에게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멈출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숙인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나는 안다.
이게 파국으로 갈 거라는 걸.
은서와의 관계가 알려지면,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회사, 가정, 사회적 지위.
수연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걸.
지현이 실망할 거라는 걸.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외로웠다.
너무 오래 남자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역할만 해왔다.
회장. 남편. 아버지.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핸드폰이 울린다.
은서다.
“내일 시간 되세요?”
나는 답장한다.
“오후에 회의가 있어요.”
“저녁은요?”
나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답장한다.
“괜찮아요.”
“그럼 내일 봐요.”
“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창밖을 본다.
내일은 또 회의가 있다.
투자자들을 만나야 한다.
완벽한 회장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은서를 만난다.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
하나는 완벽하고 안정적이지만 공허하다.
다른 하나는 위험하고 불안하지만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아니, 어쩌면 이미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서재 문이 열린다.
수연이 들어온다.
잠옷 차림.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
“왜 안 자요?”
그녀가 묻는다.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일 때문에?”
“네.”
거짓말이다.
수연은 내 옆에 선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항상 잘 해왔잖아요.”
“고마워요.”
수연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들어와서 자요. 늦었어요.”
“곧 갈게요.”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간다.
문이 닫힌다.
나는 다시 혼자다.
나는 손을 본다.
예순둘 살의 손.
핏줄이 도드라지고, 살이 얇아지고, 주름이 깊어진 손.
이 손으로 오늘 은서를 만졌다.
젊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나는 눈을 감는다.
이게 옳은가.
예순둘의 남자가 서른넷의 여자를 만나는 게.
32년을 함께 산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는 게.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은서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살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