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균열의 문장ㅣ4장 회장님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간

by 한서


그 후 우리는 네 번을 더 만났다.


한 번도 “데이트”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만났다. 저녁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


같은 호텔 라운지 바.


도현은 먼저 와 있었다. 이번에는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나를 보자 일어섰다.


“늦었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제가 일찍 왔어요.”


우리는 앉았다.


이번에는 대화가 더 편했다. 첫 번째 만남의 어색함은 사라졌다. 우리는 일 이야기를 했다. 도현은 신약 개발 프로젝트 이야기를 했다. 복잡한 승인 절차, 임상 시험, 투자자들과의 갈등.


“힘드시겠어요.”


내가 말했다.


“이게 제 일이니까요.”


도현이 대답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가 멈췄다.


“가끔은?”


“피곤해요. 책임이 무거워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변호사도?”


“응. 실수하면 클라이언트가 손해를 보니까. 항상 긴장해요.”


도현은 나를 봤다.


“그래서 외로운 건가요?”


나는 잠시 멈췄다.


“뭐?”


“혼자 산다고 하셨잖아요. 외로워서 그런 건가요?”


나는 와인 잔을 돌렸다. 붉은 와인이 천천히 흔들렸다.


“잘 모르겠어요. 외로운 건지, 그냥 익숙한 건지.”


“차이가 있나요?”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웃었다.


“찾지 못했어요.”


도현도 웃었다.


우리는 오래 앉아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일, 취미, 과거. 하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표면만 건드렸다.


헤어질 때, 도현이 물었다.


“다음 주에도 괜찮으세요?”


“네.”


나는 대답했다.



세 번째 만남.


이번에는 레스토랑이었다.


도현이 예약한 곳.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프렌치 레스토랑.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여기 자주 오세요?”


내가 물었다.


“가끔. 클라이언트 접대할 때.”


“오늘은 접대인가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도현도 웃었다.


“아니요. 오늘은… 그냥요.”



우리는 음식을 먹었다. 코스 요리. 하나하나 천천히.


도현의 손을 본다. 세월이 묻은 손. 내 아버지보다 조금 젊을까.


이상하게도, 그게 불편하지 않다.


대화는 이어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들. 도현은 자기 딸 이야기를 했다.


“입양했어요.”


그가 말했다.


“몇 살 때?”


“다섯 살. 지금은 스물둘이에요.”


“잘 지내요?”


“네. 유학 중이에요. 미국에서.”


도현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있었다.


“아내는 어떤 분이세요?”


내가 물었다. 조심스럽게.


도현은 잠시 멈췄다.


“좋은 사람이에요. 내조를 잘해요. 제가 회사에 집중할 수 있게.”


그의 대답은 형식적이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디저트가 나왔다. 우리는 천천히 먹었다.


“은서 씨.”


도현이 말했다.


“네.”


“저… 이상한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요?”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는 멈췄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도요.”


도현이 말했다.


우리는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호함이 편했다.



네 번째 만남.


다시 호텔 라운지 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와 있었다. 도현이 들어왔다. 나를 보자 미소 지었다.


“기다렸어요?”


“조금.”


우리는 앉았다.


주문했다. 와인. 이제는 메뉴를 보지 않아도 알았다. 도현은 위스키, 나는 레드 와인.


“오늘 힘든 하루였어요.”


도현이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투자자 미팅. 잘 안 풀렸어요.”


“아직 끝난 건 아니죠?”


“네. 하지만 피곤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오늘 클라이언트한테 혼났어요.”


“뭐 때문에?”


“계약서 검토가 늦어져서.”


“변호사도 혼나요?”


“당연하죠.”


우리는 웃었다.


대화는 편했다. 이제는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도현은 넥타이를 풀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편하게 해도 돼요?”


그가 물었다.


“당연하죠.”


나도 자켓을 벗었다.


우리는 더 가까이 앉았다.


시간이 흘렀다.


바는 점점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줄어들었다.


“은서 씨.”


도현이 말했다.


“네.”


“저…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뭐요?”


도현은 나를 봤다. 진지한 눈빛.


“이거 계속하고 싶어요.”


“이거?”


“우리. 이렇게 만나는 것.”


나는 그를 봤다.


“저도요.”


내가 대답했다.


도현은 내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손은 따뜻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이었다.


“복잡해질 것 같아요.”


“알아요.”


나는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잘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도현은 내 손을 꽉 잡았다.


“저도요.”


우리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다섯 번째 만남.


도현이 제안했다.


“호텔 말고, 다른 데 가볼까요?”


“어디요?”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우리는 갔다.


한남동의 작은 갤러리 카페. 조용하고 사람이 적었다. 2층 구석 자리.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물었다.


“예전에 우연히 발견했어요. 혼자 올 때가 있어요.”


“자주 혼자 오세요?”


“가끔. 생각 정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이번에는 술이 아니었다.


대화는 느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은서 씨는 왜 변호사가 됐어요?”


도현이 물었다.


“음…”


나는 생각했다.


“명확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공부를 잘했고, 부모님이 좋아했고, 안정적이니까.”


“후회는 안 해요?”


“가끔은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어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른 삶.”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회장님도요?”


“네. 가끔은 이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요.”


“그럼 뭐 하고 싶으세요?”


도현은 창밖을 봤다. 한참을.


“여행이요. 아무 책임 없이.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나는 그를 봤다.


“같이 갈까요?”


내가 말했다. 농담처럼.


도현은 나를 봤다.


“진심이에요?”


나는 웃었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도현은 웃지 않았다.


“저는 진심으로 들렸는데.”


침묵이 흘렀다.


“은서 씨.”


도현이 말했다.


“네.”


“우리… 위험한 것 같아요.”


“뭐가요?”


“이거. 우리.”


나는 알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정이 개입되고 있다는 거죠?”


내가 물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적어도 저는요.”


나는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저도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봤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 없었어요.”


도현이 말했다.


“저도요.”


“그런데…”


“알아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저도 알아요.”



도현은 내 손을 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그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봤다.


회색 머리, 깊은 주름, 세월이 묻은 손.


하지만 나를 보는 눈빛.


따뜻한 손.


나이 차이 같은 건, 이 순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요.”


도현은 나를 당겼다.


우리는 키스했다.


처음으로.



그날 밤, 나는 혼자 집에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무언가 시작됐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알았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경계가 무너졌다는 걸.


우리가 약속했던 “감정 없이”는 이미 끝났다는 걸.


나는 눈을 감았다.


도현의 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따뜻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서웠다.